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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가희의 나라 Sep 25. 2021

왕이 없는 세상, 불충인가? 새로운 세상인가?

자산어보와 기록관리

  3개월 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조차 "나는 좀 쉬어야 한다"라는 강박 때문에 글을 쓰지 않는 나를 그냥 놔뒀다.

  예전에 신문사에 글을 연재할 때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글쓰기가 일이 되어버린 때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러던 중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강렬하게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추석 때 본 자산어보와 지금 내가 기록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 포럼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자산어보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인공인 정약전 선생님이 제자와 대화를 나눌 때  했던 말이 있다. 제자 창대가 물었다. "강진 선생님은 목민심서 등 200여 권의 책을 쓰는데, 선생님은 왜 물고기 도감 같은 '자산어보'만 매달리십니까? 그러자 정약전 선생님이 말을 한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백성이 주인 되는 그런 세상이다. 내가 그런 책을 쓴다면 그나마 새로 생긴 피붙이마저 살 수 겠나?" 그러나 영화는 주자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보여준 창대 정약전의 그런 말이 불충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떠나는 것을 보여준다.(물론 양반이 되기를 원했던 창대의 개인적인 야심도 있었다.) 그 후 창대는  목민심서를 현실에서 완벽하게 실천하고자 하지만 당시 현실이 보여주는 "민"이 없는 "목"에 절망하고 다시 스승에게 돌아가지만 스승은 글을 쓰다 유배에서 풀리지도 못한 채 돌아가신 후였다.


  나는 이 영화를  매우 재미있 뜻깊게 보았다. 그것까지였었는데 며칠 전 기록인들과 비대면으로 토론을 하다가 나와 생각이 다른 ,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더 나은 기록관리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쓸모 있게 사용해보자는 기록정책포럼 취지에 동감하여 포럼 일원으로 참여한 나는 공공영역에서만 기록관리를 해 온 탓인지 현실에서  멀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나름 반감이 있었다. 법에서 정한 것들을  3, 4배도 아닌 10 이상을 말하는 것들을 들으면 비현실적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상상을 하자고 했지만 나의 상상은 빈약했고 현실은 강했다. 영화에서 정약전이 말한 "주자는 힘이 세다"라는 것과 동일했다.

  영화를 빗대어 변명하자면 글을 쓰다가 유배에서 풀리지 못하고 죽은 정약전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공공영역의 기록관리를 경험했고 그것을 학습으로 배운 터라 조직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것들을 내세우다가는 오히려 유배를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섰고 더 나아가 그런 것 들 때문에 나의 업인 기록관리가 더 힘을 쓰지 못할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에 조심스러운 것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그러한 것들에 대한 강한 주장으로 왕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정약전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꺾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 말미에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참여자들에게 했다. 그러자 참여자 중 한 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왕이 없는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정약전과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한 참이나 지난  후에야(순종 이 숨을 거둔 후 약 90년?) 왕이 없는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역설한 나에게 "왕이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일찍 올지 모른다"는 말 전해주었다.

  우리 모두는 혁신을 좋아한다 하지만 혁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혁신으로 일어나는 일을 감당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신은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혁신이 된다. 물론 그러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혁신으로 인해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 우리는 혁신을 수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혁신이 주는 이득이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을 확장시켜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혁신으로 주어지는 내 이득이 적기 때문에 그 혁신을 포기해버리고 사는지 모른다.


  그것을 좋게 표현하면 "현실감각"이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은 조직에 잘 적응을 한다. 나는 그것이 부러웠고 그것을 배우고 살고 있다. 때문에 이득이 없는 혁신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사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내게 혁신적인 혁신을 할 능력이 되냐고 물으면 막막해진다. 반면에 혁신을 말하는 누군가를 보면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모순을 범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면서 어쩌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혁신을 말하는 그들의 생각이 공공의 영역에서 잘 실현되도록 돕는 일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생각을 꺾지 않고 또한 혁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공공의 영역에서 잘 스며들도록 돕는 것, 그렇게 한다면 돌아가신 정약전 선생님의 꿈을 200년이 지나도 두려워하는 내가 아니라 그 꿈이 200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도전이 되는 또한 성공이 되는 그런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목민심서의 꿈을 꾸고 스승을 떠났던 창대는 결국 왕이 없는 세상을 꿈꾼 스승에게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자신할 수 없지만 앞으로 다가올 많은 일에  정성스럽게 전심을 다 할 생각이다.

  그것이 세상은 막연히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전가희의 나라에 사는 전가희가  그분이 돌아가신 200년 후에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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