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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의 나라 Mar 22. 2021

아이를 강아지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방법을 어린 시절 나무 잎사귀의 떨림으로 알아차리곤 했다. 다만 그것을 보는 법을 잊어버렸을 뿐 바람을, 특히 가을에 들어서는 서늘한 가을바람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나는, 오랜만에 아이들과 나온 공원에서 추억이었던 바람의 방향을 세느라 여념 없었다. 집순이로 살아온 나에게는 나름 환영의 핑계였던 코로나 19 덕분으로 집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아이들은 오랜만에 나온 공원에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다는 말이 맞다. 내가 바람의 방향을 세느라 잠시 한눈파는 사이 떠들던 아이들 대신 강아지 소리만 들렸을 뿐이니까.


  생각으로는 잠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키 만한 나뭇가지로 서로가 악당인 양 놀고 있었고 강아지들만이 내 주위로 그들의 주인과 함께 모여들었다.

  하얀 털이 수북한 tv에서만 볼 법한 잘 관리된 강아지가 주인을 안고 뽀뽀도 하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벤치나 주인 무릎에 앉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개의 본성은 달리기에 있는 것, 주인이 잠시 주위를 살피는 순간 강아지들은 목줄의 길이만큼 달리기를 일삼았으며 옆의 개와 으르렁 거리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개들은 서로의 꼬리를 따라 빙빙 도는 듯 탐색과 호기심의 시간은 끝이 없었다. 강아지 주인들은 서로 간의 강아지를 칭찬하고 이름을 물어보며 자신의 강아지와 비교하며 그것들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 공원에는 강아지 주인과 아이의 부모들로 섞여있었는데, 슬프게도(?) 강아지 주인이 아이의 부모보다 겉보기에는 행복해 보였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집은 큰아이 찾다, 작은아이 놓치고, 둘의 싸움을 말리기도 하고 넘어진 아이 엉덩이 털면서 “천천히 다니라고” 소리를 높이기도 하는 등 아이들의 정신없음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혹 그들 중,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인다면 그러한 상황이 모두 지난 후 지친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를 강아지에 비유하고 싶지 않지만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것을 잊고 그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웃음을 빵 터트리고 말았다. 강아지들의 “목줄”만이 아이와 강아지의 차이점을 말해줄 뿐 강아지가 목줄만 푼다면 공원에 있는 아이와 강아지의 행동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아지가 사람(주인)에게 충성할 뿐 아이들은 사람(부모)에게 충성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며 스스로의 인생에 충실할 뿐이었다. 강아지는 주인의 여러 가지 지시에 따라 짖기를 멈추며 주인의 감정을 살피며 그들의 다리에 앉을지, 다리 옆에 앉을지를 따른다. 주인의 엄한 명령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강아지가 그들의 욕구(달리기 등)를 멈추는 즉각적인 명령이 되기에 주인은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 주인에게 강아지는 위로가 되는 것이다. 


  강아지의 목줄을 풀어헤친다면 어떻게 될까? 강아지와 아이들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함께 뛰었을 것이고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온몸에 흙을 묻히고도 행복해했을 것이며, 옆집 강아지와 싸우다가 울기도 했을 것이다. 강아지 주인들은 그런 강아지를 찾느라 땀을 뻘뻘 흘렸을 것이고 편안해야 할 산책이 흙투성이 뒤집어쓴 노동으로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강아지 목줄은 사람을 노동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의 산책을 산책답게 만들었다. 또한 강아지와 아이를 구분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나는 그 순간을 그렇게 웃고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나로선 그 정신없음이 익숙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이젠 요령이 생겨 정신없음을 포기해 버릴 때도 있다.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아이들과 하늘을 본다든지 공원을 걸으면서 나무의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는 동화책에 나올법한 모습들은 접어둔 지 오래다. 나의 엄한 명령이 아이들의 귀엔 잘 안 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오래며, 들었음에도 도망가 버리는 상황을 알면서도 더 이상 야단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해버리곤 한다.  

  공원에 간다는 현실에 직면하면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운동복을 입으며 오늘도 걷기보다 뛰는 것이 일상이라는 미리 예견한 직감을 늘 현실로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은 후 강아지와 산책하는 그들과 달리 여유를 즐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 나의 행복에 대한 결론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부럽다”였을까?  아이를 강아지에 비교하는 아주 괘씸하고 고민되는 제목을 정하긴 했지만 나의 행복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의 여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강아지 주인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서로 간의 강아지 나이를 묻고 있었다. 강아지가 몇 살이냐 물으니 13살이라 답하자 어려 보인다고 했다. 강아지 나이로 13살이면 어른이겠구나 하고 짐작했다. 그때 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는 내 아이들의 성장한 모습을 생각했다.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는 큰 아이의 소망도 생각했다. 그리고 누워만 있던 아이가 자라 걷고, 뛰고, 학교를 가는 세월 동안의 성장 변화도 생각했다. 목줄로 지탱해온 관계가 아닌 처음부터 목줄이 없었고 앞으로도 아이 스스로가 만든 줄의 길이만큼 자랄 나의 아이들은 태어나 이 생이 끝날 때까지 목줄에 의지해야 하는 강아지와는 다를 것이다. 

  오늘 나의 주책스러움이, 정신없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그런 미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당장의 여유는 없지만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는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소망하며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육아를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책스러움과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여유를 부리는 그 시간 또한 행복하다. 행복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무척이나 와 닿는 하루였다. 

형과 적군처럼 싸우고 난 후,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동생을 나와 큰 아이가 번갈어 업어가며 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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