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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의 나라 Apr 07. 2021

공공기록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록연구사 이야기(1)

  나의 어린 시절, 할머니는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한 나의 할 어머니였다. 나의 아버지 형제는 5남 3녀였고 그중 3명의 형제, 즉 나의 삼촌 가족들은 우리 가족과 고향을 함께한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중  가장 큰 형이었던 나의 아버지만 유일하게 아들을 낳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 살았던 그 시절에는 딸은 사주팔자에 "자식"에 포함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 나의 아버지는 줄 줄줄줄줄 줄이 딸을 낳았고  다행히 나는 그 줄 중 막내 줄이었다. "다행히"라고 쓴 것은 치열했던 언니들과의 인생을 비교해 봤을 때 내가 조금 더 나았음을 지금에야 인정한데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초등학생 시절 언니들이 하던 신문배달을 하지 않았고 언니들이 가보지 못한 유치원을 나왔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보면 나의 할머니는 당연히 삼촌들의 남자아이들을 사랑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의 할 어머니는 줄 줄줄줄줄 줄이 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많이 아꼈다. 당신이 아들을 많이 낳아서 그랬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짐작일 뿐, 내 할머니가 우리를 사랑한 이유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영원히 미궁일 것이다. 삼촌들의 자식들은 우리 언니와 내게 "너거 할머니 지나간다" 할 정도로 할머니가 우리 가족만 챙긴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 초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나의 친구였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마땅한 친구가 없던 내게 점심을 같이 먹는 친구였고 소풍을 가든 운동회를 하든 늘 내 곁에 묵묵히 계셨다. 여름에는 할머니 친구들과 함께 근처 강가에 모래찜질을 했고  쌔깜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를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종종 내게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어느 나그네가 밤에 잘 곳이 마땅치 않아 길을 헤매다 누추한 오막살이에 당도했고, 주인에게 하룻밤 신세 지겠다고 했다. 주인은 그러라고 했고 방이 마땅치 않아 같이 자기로 했다. 잠을 자기 전 나그네와 주인이 이야기를 하는데 나그네가 보기에 주인이 너무 다리를 떠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잠을 자고 난 후 새벽에 주인의 다리를 자르고 도망을 갔다. 그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그 집에 가보니 누추했던 집이 대궐이 되어있었고 주인은 매우 부자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다리를 떨면 복 나간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야기의 어이없음(다리를 자른 게 뭐가 좋냐 등등)은 무시한 채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밥을 먹고 난 후 할머니 다리에 누워 이야기를 들었던 그 시간들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이가 하나 있는 남자가 아이가 하나 있는 과부에게 재취를 해서 살았는데 시어머니도 같이 살았다고 한다. 두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사는데 남자 쪽 아이는 늘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만 먹는데 늘 허름한 옷을 입고 허름한 음식을 먹는 여자 쪽 아이만 잘 크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상황이 의심스러워 며느리를 몰래 따라다니며 며느리가 남자 쪽 아이에게 하는 것을 보는데 아무리 쫒아다니면서 살펴봐도 며느리는 남자 쪽 아이를 본인 아이보다 더 잘해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고민 끝에 며느리가 잘 때 혹시 남자 쪽 아이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어느 날 밤 몰래 며느리가 남자아이 둘을 옆에 끼고 자는 것을 보는데 며느리는 그 상황에도 남자 쪽 아이를 바라보고 그 아이를 안고 자는 것이 아닌가? 하, 이상하다 하고 이 시어머니가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자고 있는 며느리 몸에서 푸른색 연기가 나오더니 며느리 등 뒤에서 자는 며느리의 친 아이에게 가는 것이 아닌가? " 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식에게 엄마의 기운이 간다는, 엄마 마음은 자식을 떠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할머니 무릎에서 듣고 컸다. 

  나에게  이야기는 재미를 벗어난 할머니의 따뜻함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린 시절 부잣집에나 있을법한  위인전 100권이 아주 가난했던 우리 집에 있었고 나는 그 책을 초등학생 시절 내내 연독해서 읽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위인전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나의 둘째 언니가 사준 책이었다.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아무도 공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는 것이 중요했던 그 시절, 위인전 100권은 내게 단비 같은 존재였다. 친구도 없고 티브이도 보기 힘든 상황에서 그 책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넘어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큰 친구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림도 없고, 색깔도 누랬고, 글자는 심히 많은, 그 책을 읽은 내가 신기할 정도다. 아마 이런 걸 운명이라 할지 모르겠다.  글을 좋아하던 아이에게 주어졌던 가치 있는 운명과의 조우.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와 위인전을 읽으면 컸다. 어린 시절 나는 이야기와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아이였다. 학원 근처에도 못 가본, 늘 말없이 앉아있던 꾀죄죄한 아이가 초등학생 때 시를 써서 단번에 우수상을 탔던 것도 아마 이야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무렵 심심풀이로 읽은 토지, 태백산맥, 삼국지 등으로 공부도 잘하지 않던 내가 수능 모의고사 국어시험에서 단 한 문제도 안 틀린 것도 이야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토지 전권을 고등학생 시절부터 읽어 2~3년마다 연독해 40대가 된 지금 6번을 읽고 책을 쓴 것도 이야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을 하려다 적성에 맞지 않아 여기저기 기웃대던 시절, 기록을(그 당시 나는 이것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연구하는 공무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관련 대학에 들어가 공무원만을 염원하던 나의 부모님에게 기록연구사라는 직렬로 그분들의 소원을 들어준 것도 할머니와 100권의 위인전에서 유래한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록연구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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