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일기 by 혜진
은결님, 일본어를 보험처럼 두고 공부한다는 표현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혹시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이웃들이 다들 참신한 표현이라며 감탄을..)
그런데, 그 안정적인 직장을 두고 왜 별도로 보험을 둘 생각을 하셨을까요..?! 우리 다음번 주제는 각자의 '일'에 대해서 한번 써볼까요? (자연스럽게 제목 유도ㅎㅎ)
아시다시피 저는 일문과를 나와서 일본계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일문과를 나와서 일본어를 활용해서 일본 회사에 갔어요-라고 하면 응당 그럴만한 흐름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분도 있는데, 실상은 메리트가 하나도 없는 일이랍니다.
기본적으로 일본계 회사의 입사 필수 조건 중 하나가 '일본어 능통'인데, 일문과 출신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독보적으로''돋보이게' 잘하지는 않거든요. 당연한 얘기지만 실무적으로 언어를 많이 쓰는 사람이, 그리고 타고난 언어 센스가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잘하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타고난'을 이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 곤란할 때가 회식 자리에요. 일본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어서 기본적으로 일본어로 대화가 오가는데요, 가끔 어처구니없는 단어를 물어오는 '놈'들이 있어요. (지들도 모르면서!) 그럴 때 일문과 출신들은 맹공격을 당하는데 (그니깐, 지들도 모르면서!!), 하- 이럴 땐 스마트폰을 테이블 아래에 숨기고 몰래 검색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척을 하는 신공을 발휘하던가- 창피를 무릅쓰고 모른다고 자백을 하던가-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대학 졸업한 지 이십 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어학 말고 다른 거 전공할 걸 하는, 뒤늦고도 엉뚱한 후회를 합니다.
일본어를 왜 전공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게... 쉬워 보여서에 해요. (이런 멋없는 대답 참 싫다)
제가 다닌 학교 인문대엔 영문과, 일문과, 철학과, 사학과, 국문과(읊어놓고 보니 취업 안되는 종합세트 느낌. 문송하네요) 가 있었는데요, 영어를 4년 내내 공부할 자신이 없었고, 철학이니 사학이니 아예 관심조차 없었고요. 상대적으로 일문과가 쉬워 보여서 갔답니다. 그게 끝..
은결님은 일본 소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어서 일본어 공부를 상대적으로 시작하기 쉬웠을 것 같은데요. 전 지금도 일본 문학, 일본 노래, 일본 드라마, 일본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어쩔..) 읽을수록, 볼수록 제 정서랑 안 맞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이렇게 맞지 않는 일본어를 전공이랍시고 꾸역꾸역 공부했으니...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은결님이 사랑하시는 에쿠니 가오리의 대표작 '열정과 냉정 사이'를 20대 때 읽고 고구마를 백 개 먹은 답답함이 밀려왔답니다. 특히나 여주인공 아오이의 권태롭고도 한가한 느낌의 심리 묘사, 같이 동거하는 남자의 허벅지가 어쩌고.. 하는 글을 읽으면서 깊게 한숨 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사십 대인 지금 읽으면 아오이의 심리가 다시 읽힐까요? 잠깐 궁금해집니다)
딱히 좋아하는 일본 작가도, 일본 배우도 없고 그냥 하루키의 달리기와 성실함만 좋아합니다. ㅎㅎㅎ
쓰고 보니 문득 저에게 일본어란 밥벌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자꾸 딴짓이 하고 싶은가 봉가)
문득, 은결님의 보험 같은 일본어가 나에겐 너무나 쓸쓸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 다른 보험이 없나?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는데, 없네요.
일본을 좋아하지 않고, 일본어를 좋아하지 않으며, 일본 문화는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 일본 회사 재직 12년 차 직장인입니다만... 그래도 버텨야지요. 당장은 그게 저의 보험이네요.
나이는 계속 먹어가고 회사에서의 입지도 점점 약해지지만, 튼튼한 이 다리로 한번 버텨보겠습니다.
아, 나에겐 튼튼한 다리가 있구나!
알았다 나의 보험!
체력이 보험이다, 에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