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에 이르렀나(至安)를 묻기 전에 편안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知安) 자문한다. 그러면 편안함의 반대는 무엇인가? 단순히 불편? 여기서부터 실체를 쫓아본다면 편안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편안하지 않다 즉 불편(不便)에서 불안(不安) 그리고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머릿속에 그려보는 상상(想像), 실현가망이 없는 것을 마음대로 상상하는 공상(空想) 그리고 허황된 생각을 하는 망상(妄想)으로 확대되는데 허황된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안단계 : 상대적 존재개념이 아닌 일반적인 존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전후상하좌우(前後上下左右)의 불안의 근원적 기인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고 간주해 보자.
전: TV 소음소리와 자신과 관련된 프로그램
후: 막혀있는 미닫이 문 또는 정체 모를 옆집의 사람들
상: 꾸준하고 지독한 층간소음
하: 음식(마늘 같은 자극성 음식) 냄새
좌: 대로상의 횡단보도상에서의 낮선시선과 대로의 앰뷸런스 및 119 사이렌 소리
우: 아파트 옆동의 특정한 빛 (LED로 식물을 키우는 특정호수의 불빛)과 자동차의 휘슬소리 (주차된 차문이 닫히거나 열리는 소리)
둘째 망상단계 : 불편함을 불안으로 기인하고 그 불안을 보듬기 위해 아니다 아니다 하고 머릿속에 그려보지만 절묘한 우연과 타이밍의 시선은 결국 상상에서 공상과 망상으로 흐른다. 공상과 망상으로 흐르는 개별적이고 기이한 의식의 흐름은 아래처럼 의심되고 경계하게 된다.
전: TV 프로그램 자체를 부정하고 자기와 결부시켜 압박을 가한다고 망상한다.(모든 디지털전자제품인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가 휴대폰 와이파이로 조정당한다고 생각한다)
후: 막혀있으나 동시에 열 수 있는 공간이며 자극적인 냄새를 차단하기 위해 스스로 문을 닫으며, 정체 모를 옆집사람들과 엘리베이터 동승하기가 불안하다.
상: 인위적인 층간소음이라 확신한다.
하: 절묘한 타이밍에 문들 닫게 하기 위해 자극적 냄새를 위로 보낸다고 공상한다.
좌: 대로상의 횡단보도의 검은 옷과 마스크 차림의 낯선 이들의 대기하는 시선이 불안하며 또한 사이렌 소음도 불안하다.
우: 강렬한 LED 빛과 자동차 디지털키의 휘슬소리가 무언(無言)의 시그널로 오인한다.
셋째 깨달음 단계: 가짜를 찾기 위한 명명백백한 반증의 저항 또는 닥쳐오는 더 큰 불안을 타개하기 위한 체념과 포기의 순종, 긴 시간의 사색과 상념은 외부로의 자극을 망상하지 말고 나 자신의 본연의 자아와 주체를 찾아가는 것에 자신과의 타협과 협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사소한 분개와 부주의했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계기는 비겁함도 아니고 아둔함도 아닌 지혜로움이다. 저항과 순종을 할 줄 몰라 못한 게 아니며(어쩌면 모를 진짜를 가지기 위해 나를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난 절충한다.(진짜를 버리고 나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전: TV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안 보게 되고 보더라도 채널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며 그저 신변잡기 바보상자일 뿐이다. 디지털 전자제품은 모두 유효생명기간이 있다. 영원하지 않다.
후: 부엌의 환풍기기능의 한계이고 자주 환기시키면 된다. 옆집 아저씨랑 인사를 주고받고 지내는 사이다.
상: 간헐적 인테리어 공사는 소음을 필히 동반한다.
하: 밑에서 올라오는 음식냄새는 문을 닫으면 자연스럽게 차단된다.
좌: 횡단보도는 웨이팅을 동반하며 검은 마스크와 검은 의류는 나도 많이 가지고 있다.
우: 가정용 전기요금이 저렴하다 보니 식물을 키우나 보다 생각하며, 전기요금을 올려야 되지 않겠냐 하고 상상해 본다. 나의 자동차도 디지털 키로 문을 열고 닫는다.
이 무슨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이냐? 왜 이런 글을 쓰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의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다. '전후상하좌우'의 불편, 불안, 망상단계의 발생 공통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즉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내가 스스로 자인하고 깨달은 큰 자각은 바로 쉼에서도 움직여야 되는 적극적 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탈피전에 그 희망하였던 쉼은 존재하지 않는 망상의 소극적 쉼이며 탈피하고야 나서 나의 현명함을 안 것이다.
동기부여의 영문 motivation은 '움직이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모베레(movere)에서 나온 말이다. 마음을 움직여(move)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출처: 조직심리학 중에서) 나의 닉네임이 '모베레'인 것은 나의 표층의식(현재의식)과 반대로 잠재의식(심층의식) 속에서 꿈틀대는 움직임의 원동력의 힘, 그 근원인 동기부여를 열망해서 아주 오래전에 지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기 싫은 것만 안 하고 살았으면 하는 표층의식의 쉼과는 상반되게 나의 잠새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움직임'과 적극적 쉼을 나도 모르게 갈망해 왔던 것이다.
즉 나를 찾는 지금의 적극적 쉼의 기간 속에서 나는 계속 움직였고 움직이고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동기부여의 자화상을 회복하고 오십이 넘은 지금에야 비로소 유년기의 활달하고 단단하였던 나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감정을 분류하고 필터링해 정제되게 전달하는 과정을 익히는 것은 쉽지 않은 고난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사소한 일에 분개하는 비효율적 감정소비를 벗어나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소비하고 그리고 비축한 에너지를 다시 효용 되게 소비할 줄 아는 열정적인 movre의 희망의 과정을 지금 생사가 걸린 화두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왔다.
'Movere! 지안(知安)에 이르렀나?'
누가 묻는다면 , '네! 그렇지만 비로소 알아간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 질문은 다음의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해야 할 것이다.
'Movere! 지안(至安)에 이르렀나?'
그리고 반대로 나도 질문한다. 그 질문의 실체는 지금 여기서 쓰지 않으련다. 미래의 나의 질문에 답을 아는 그 누구는 마찬가지로 나에게 대답해 주었음 한다.
- 2023년 11월 7일 적극적 쉼의 기간 딱 절반인 날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