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가짜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 아네르스 포그 옌센)' 그리고 또 하나는 '세이노의 가르침 (세이노)'이다. 두 책의 서평이라든지 감상문 또는 분석을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고 제목의 주제에 맞는 예로서 이 두 책을 비교해 본다.
먼저 이글의 제목을 '수용'으로 할 것인지 '분별'로 할 것인지 고민하다 '분별'로 결정하였다. 두 단어는 대립적이면서도 포용적이고, 한계적이면서도 극복적인 단어의 이미지라 수용의 녹아내림은 분별로써 대비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분별을 선택했다.
다시 두 책의 이야기로 돌아와 '가짜노동'은 어렵게 읽혀 책을 읽는 것인지 글만 읽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둔감한 독서였지만 읽고 나서 무언가 와닿는 느낌이고, 반면 '세이노의 가르침'은 쉽게 공감하면서 명쾌하게 읽히면서도 무언가 다가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여기서 분별과 수용을 대입해 본다면 단순히 분별해서 수용하라는 교훈적 가르침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고, 분별의 속뜻과 수용의 내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에서 두 권의 책 모두 새겨들을만한 가치를 발견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수용함에 있어 분별하라는 뜻도 되지만 분별해서 수용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되며, 분별 안에 수용이 있을 수도 있고 수용 안에 분별이 있을 수도 있기에, 행여 말장난으로의 흐름을 경계하여 분별하여야만 하는데 그 본질은 상황과 태도의 인식이다.
'나는 내 임대 건물에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들어오겠다고 하면 모두 거절하여 왔다. 주인이 직접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알바생들을 써서 무슨 맛이 제대로 나겠는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세이노의 가르침 中에서)
언듯 보면 시대적 거리감이나 세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단순상황으로 치부하는 것이 분별의 오류인데 이런 경우 프랜차이즈의 전략적 마케팅은 오히려 건물의 가치를 높여주는 발상의 전환의 한 부분으로 분별해서 따로 인식해야지 '세이노의 가르침'의 무분별적 오류로서 밑줄 그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수용이란 독립적 자아의 객체를 또 다른 개별적 자아가 대등한 견지(입장)에서 수용하는 것이지 먼저 분별해서 수용과 비수용으로 나눠 버리기식의 수용은 수용의 진정한 자세도 가르침도 아니라는 것이다. 주체적 선택은 또 다른 별개의 사안이고 그 이전의 본질은 '분별'과 '수용'이기 때문이다.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얻은 많은 공감을 토대로 다만 독자로서 공감할 수 없는 아쉬움도 분명히 있는 면을 스스로 자각하고 입장을 견지한 상태에서 공감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지만 힘든 '가짜노동'에 대해서는 쓸 말이 별로 없고, 읽히기 쉬운 '세이노의 가르침'에선 그 냉정함이 수용을 방해하는 요소로 부각된다.
'하나의 지식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해서 재사용하거나 거기에 몰두하고 빠져듭니다. 그런데 이와 다르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의 내용을 소유하고 정해진 효용성안에 매몰되기보다는 그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따지고 그것이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작동과 기능을 보려고 합니다' (가짜노동 中에서)
'가짜노동'에서 인용한 위 문구가 분별과 수용의 대립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 관계를 녹아내리게 하는 적절한 설명 아닌가 싶다. 분열된 자아가 상황을 적절한 태도로써 수용하기 어렵듯 경직된 분별은 수용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명한 분별만이 수용되어야 하는 것만도 아니다.
분별만이 필요할 때가 있고 수용만이 필요할 때가 있듯이, 분별과 수용은 공생하며 동시에 필요할 때도 있다. 두 권의 책 느낌을 정리할 때 상반된 감정과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솟구친 글을 쓰고 싶다는 내재된 마음을 일으켜주는 것은 쓰는 글의 대한 관심이고 읽는 책의 힘이 아닐까 싶다.
분별과 수용은 서로가 객체가 되기도 하고 주체가 되기도 한다. 단지 독자는 선택할 뿐이다. 다만 길러야 되는 힘이 있다면 책을 읽고 느끼는 감정이 외부의 내재된 억압으로부터 배제된 온전한 감정이듯 행동과 상황 또한 온전한 나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수용의 선택의 주체이어야 한다.
삶의 주인공은 모두 각자 간섭받지 않는 당연한 권리이며, 더 이상 비주체적 태도는 자신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비극이기 때문이기에 일을 통한 삶을 통찰할 수 있는 두 권의 책 읽고 느껴지는 바를 글로 옮길 수 있는 자유가 그래서 나는 너무나도 좋다.
분별과 수용의 궁극적 근원은 자유로운 삶이며 자신답게 자신 있는 삶의 근원 또한 자유로운 삶이다. 분별과 수용의 대립적 각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선별하고 수용하는 것의 근원 또한 자유로운 삶이다. 자유는 쟁취하는 것인지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마저 알려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의 자유는 아직은 저 멀리에 있는 것 같다.
자유로운 순간의 희열과 최선의 안도감은 결국 편안으로 귀결될 그날을 영원히 꿈꾸며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나날들! 앞으로도 너무 힘들지 않게 분별하고 너무 힘들지 않게 수용하길 나 자신에게 주체적으로 바랄 뿐이다.
- 2024년 5월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