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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맹이 Oct 13. 2019

내가 처음으로 혼자 여행 했을 때

뭐든 처음은 어렵다

  다른 나라를 혼자 여행해본 적이 있나요? 
혹시 혼자 여행이 처음인가요?


  책상꼴이 이게 뭐냐는 엄마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며 버티기를 2년. 이미 엄마도 날 포기한지 오래된 이 시점, 갑자기 책상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엄마의 잔소리가 최면처럼 내 무의식에 스며든건가? 그렇게 책상 정리를 하며 2년 간의 흔적을 한 겹씩 지워내는데, 책상 책꽂이에서 무심코 집어 든 파일 아래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이 툭, 털어진다. 내가 처음으로 나홀로 여행을 계획하며 무언가를 휘갈겨놓은 쪽지였다. 그 종이를 펼치는 순간, 입가에 나만 아는 웃음이 번진다.


나홀로 해외여행의 첫 목적지는 영국 런던이었다.


  그건 지하철 Oxford Circus역부터 런던 숙소까지 찾아가는 길을 그려놓은 약도였다. 이걸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나의 옛모습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던거다. 숙소 찾아가는 길을 약도로 그려놨다고? 구글맵 척 켜서 GPS 따라 가면 되는데 뭘 이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나 구글맵 엄청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정말이다! 다만 이건 내가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게 됐을 때 그린 것이라고 하면 이해될까?


  혼자하는 여행을 처음으로 마음 먹었던 건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수능에 찌든 고딩들이 으레 생각했던 평범하디 평범한 소망이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원하는 대학만 가면, 열심히 모은 돈으로 혼자 멋지게 한 달간 유럽을 돌고 와야지.' 그러나 인생은 원하는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아서, 내 소망은 거의 10년 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그 세월의 사이사이, 힘듦이 유난히 북받칠 때마다 '나홀로 유럽여행'은 점점 거대한 프로젝트로 변해갔다.



외국에서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해봐야지
영국에 가면 아침으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먹을거야.
제인 오스틴을 좇아 바스(Bath)를 여행해야지
오만과 편견 촬영지에 가서 엘리자베스가 되어보는거야.
조앤롤링의 흔적을 쫓아 해리포터 여행을 해보는거야.
세계 불가사의도 보고 싶다. 유럽엔 어떤 세계 불가사의가 있었더라?
오로라를 직접 보면 어떤 기분일까?
이탈리아에선 파스타집을 미친듯이 돌며 인생 까르보나라를 찾고 말겠어

      .

      .

      .


핀란드에서 봤던 오로라. 핀란드 여행기는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하고 싶은 게 생각날 때마다 자료를 하나씩 스크랩 해놓기 시작한게, 여행이 실현될 즈음엔 어마어마하게 불어 있었다. 때가 되어 당차게 항공권을 샀을 땐 이것들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사는게 행복하고 돈 버는게 행복했다. 이미 하고 싶은게 정해져 있었고, 또 혼자 가는 여행이라 일정 짜는 것도 크게 갈등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니까. 혼자가면 일정 짤 때 다른 사람과 의견 조율을 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메리트지, 암!



첫 혼자 여행 때 투어로 갔던 스톤헨지


  하지만 그땐 몰랐다. 마냥 행복하기만 같던 마음은 여행 출발 일주일 전, 걱정으로만 가득차게 될 것이란 걸. 드디어 일주일 후면 출발인데, 나는 맛집리스트 대신, 걱정리스트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난생 처음 가보는 곳에 외국인 신분으로 혼자 떨어지게 된다는 두려움이 왜 이제서야 몰려오는거냐고. 


유럽에는 소매치기가 많다던데...더군다나 동양인 여자가 혼자 다니면 소매치기 표적이 되기 쉽다던데
버스 짐칸에 실어놓은 캐리어를 훔쳐가는 나쁜 놈도 있다던데
요즘은 집시도 옷을 잘 입어서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더라
도착하면 저녁인데 숙소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핸드폰 화면 보면서 걸어다니다가 핸드폰 날치기 당했대
내가 어리버리 헤매는 모습을 보이면 표적이 될지도 몰라 엉엉ㅠㅠ
예쁜 야경 보고 싶은데, 밤에 혼자 나가도 괜찮을까



그렇게도 낭만 가득해 보였던 유럽은 내 머릿속에서 세상 가장 위험한 으로 변해있었다.


걱정의 끝은 항상 "아씨, 내가 미쳤나봐. 어쩌자고 혼자 한달이나 여행을 계획한거야!"

로 끝나기를 무한반복. 패기 넘치게 항공권을 구매하던 때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거야? 

쫄보도 이런 쫄보가 없었다. 


그 때 갔던 해리포터 스튜디오


그럼 이제라도 동행을 구하면 될 것 아니냐? 유X 카페에는 하루에도 동행 구하는 글이 수십개씩 올라오는데 말이다. 근데 그건 또 싫다. 나는 프로 귀찮음러거든. 오죽하면 책상정리도 2년 만에 하겠나. 한 달 동안, 가는 곳마다 카페로 동행을 구하는건 더 귀찮고 신경쓰여!! 차라리 그 시간에 혼자서도 안전할 방법을 연구하겠어.


결국 두 개의 원칙을 정했다.

1. 동행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경우가 아니면 그냥 혼자 다닌다. 
2. 혼자일 때나 아닐 때나 내 안전은 내가 챙긴다.



어두운 저녁에 혼자 걷고 있는 동양인 여자 관광객, 등에는 38L짜리 거대한 백팩을 매고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으로는 폰 화면만 뚫어져라 보면서 걸어가는 중. 내가 소매치기라면 이런 사람을 털지 않을까? 자유로운 손 하나는 확보해야 소매치기가 접근하더라도 방어나 공격(!)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리어를 버릴 수는 없으니 폰을 버리기로 했다. 까짓거 가는 길 외워버리지 뭐. 구글맵을 보면서 약도를 그려나갔다. 구글 스트리트뷰를 보고 또 봤다. 15~20분 거리의 약도가 머릿속에서 3D 지도처럼 그려졌다. 어느 모퉁이에 어느 가게가 있는지까지 훤하다.


웃픈 약도는 이런 생각의 결과 탄생한 것이다. 저걸 그린 후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은 저 때의 내가 참 웃기게 느껴지지만 저땐 진짜진짜 심각했다.


작년에 다녀온 유럽 혼여행


그럼 지금은 어떻게 혼자 여행 다니고 있냐고?


아주 간땡이가 팅팅 부었다. 직장생활연차가 차오를수록 저런 약도를 그릴 심적 여유는 없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다니고 있다. 자유여행자의 친구 구글맵을 벗삼아 별표로 저장만 해놓으면 그걸로 끝인 것. 여행 일정이란 것도 사실 상 거의 짜놓지 않는다. 어차피 혼자인데 길 좀 헤매고, 숙소에서 널부러져 있다고 해서 눈치볼 사람도 없잖아?


하지만 요즘은 아주 가끔씩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행을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한 명 있으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혼자가 더 좋다. 이 자유가 끝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그 행복을 계속 느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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