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와인모임! 참으로 의심스러운 모임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저기가면 내가 만나고픈 괜찮은 사람들이 있을것인가, 시간과 돈만 버리고 오는 것은 아닐까,
괜히 갔다가 기분만 더 우울해져서 오는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모임비를 결제하기 전- 아니 결제하고 나서도 모임에 나가기 전까지 머리속을 떠나질 않는다.
한국처럼 닫히고 편견많은 사회에서 솔로들이 어디서 ‘괜찮은’이성을 만나야 할지는 그 누구도 알수가 없다.
다들 자만추!를 외치지만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계기도 여건도 없이 다들 각자만의 세계와 세상속에서 나오질 않으니 말이다.
작은 대안으로 여러가지 퇴근 후나 주말을 이용한 직장인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중에 하나인 와인모임을 나가보았다.
- 참으로 여러방면으로 노력중인 노처녀의 ‘괜찮은’ 남자만나기 여정 ㅎㅎ -
퇴근후에 뷰좋은 작은 파티룸에서 진행되던 와인모임에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이 북적였고, 서너명씩 로테이션하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 대기업이나 금융권에 종사하면서 유쾌한 사람들이었던것 같다.
와중에 외모는 고만고만한 남자들 가운데서 맨처음에 입장할때부터 눈에 들어온 키크고 잘생긴 남자 한명이 있었다.
그가 우리테이블에서 대화할 차례가 되어서 내 옆에 앉아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네…?? 구십..몇년생이라구요?“
주변에 있을법 하지 않은 어린 나이었다. 가장 눈길이 가서 모임 내내 슬쩍쓸쩍 보곤 했던 사람이었는데 너무 많은 나이차이를 듣자마자 마음을 자연스럽게 접게되었다.
외모가 그렇게 어려보이진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여덟살이나 차이나는 사람이 이성으로 느껴질까 라고 자문하며 그때부터 마음을 놓고 편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휴 그래 첫술에 배부를수 없지, 처음 참석해놓고 무슨 운명을 만난다구 기대해
그냥 인맥쌓을 겸 재밌게 대화나 하고 집에 가자
라고 편한 마음으로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이와는 별개로 그와의 대화는 일초의 지루함도 없이 잘 흘러가다
시간이 다 되어 그는 다른 테이블로 이동했다.
이 모임은 파티가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마음에 드는 이성을 몇 명 적어내면 1순위부터 매칭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만약 2순위로 적어낸 이성끼리 매칭이 되더라도,
서로가 1순위인 이성이 매칭이 되면 그 이성커플만 우선적으로 매칭을 시켜주는 나름 와인모임 치고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1순위로 적어낸 여덟살 어린 그 남자와 내가 서로를 1순위로 적어 내었나보다.
우리는 서로 매칭이 되었다.
파티가 끝나고 마음에 맞는 사람 몇명끼리 뒤풀이를 가는길에 우리는 각자 매칭이 되었다는 카톡을 받았고
그 자리에 있는 아무도 모르게 우리둘이 서로 매칭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뒤풀이 장소에서도 우리는 맞은편에 앉아 서로의 공통점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그가 둘만 따로 나가서 술한잔 하는게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했고, 사람들의 의아한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둘은 뒤풀이 장소에서 둘만 빠져나왔다.
알고보니 그는 한국에 들어온지 몇 년 안 된 교포였다.
대화할 때 별다른 특이점이 없이 한국말을 잘 해서 몰랐는데 알고보니 한국말이나 한국사람들끼리 하는 대화중 많은 부분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으레껏 분위기를 파악해서 같이 웃고 분위기를 맞춰주고 있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그가 나에겐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단어나 관용어 등을 말하면 못알아들어서 영어로 다시 설명해줘야했지만 그게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또하나의 색다른 재미였다.
그는 내가 본인의 나이를 듣자마자 너무 격하게? 반응을 해서 ‘아 이사람은 나이때문에 나한테 관심이 없나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했으며,
외국에서는 사실 나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데 한국은 나이로 사람을 너무 규정짓는다고 자기는 나이차이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여덟살 차이가 뭐가 어때서? 나는 별 상관 없는데..”
그리곤 나를 바로 ‘너’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는데
어딜가든 나이로 후려치기를 당해 와서 그런지,
나이를 듣고 나를 규정짓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인간대 인간으로 봐주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몽실해졌다.
그날 이후 몇 달 간 이어져온 우리의 관계
마찬가지로 그와 전화를 하면 기본 두세시간씩 떠들곤 했다.
특히 그는 말이 많아서 그의 주변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도 사진을 보내고 전화로 조잘조잘 말하며 떠드는 사람이고,
쉬는 시간이 있으면 자주 같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그런 특성덕분에 우리 관계가 계속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대화방식은 되게 특이했다. 물론 내가 서양인의 특징을 잘 몰라서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인들이 썸이나 연애때 하는
잘잤어? 굿모닝, 출근 잘했어? 점심 잘 먹었어? 뭐먹었어? 라는 카톡이라든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싸울때 보통 어떻게 푸세요? 취미가 뭐에요? 주말에는 보통 뭐하세요? 라는 티피컬한 질문들을 그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
왜 너는 그런질문들을 안하냐고 어느날 물어봤더니,
자기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데 저런 질문들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
오히려 내가 회사에서 무슨일을 어떻게 하는지 같은 것들을 더 궁금해 했던것 같다.
그러나 그는 매우 바쁜사람이었고, 한달에 몇 주를 출장때문에 한국을 떠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많이 편해하고 좋다는 표현을 많이 해줬는데 나도 그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쁘고 출장이 많은 그와 오래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던 어느날
내 동생이 결혼을 했다.
내 동생 결혼식에 가서 만난 친척들과 여러 부모님 지인들의 입에서 축하인사와 함께 후렴구처럼 나오는
‘ 첫째딸도 빨리 가야지.. ’라는 말에 허허 웃으며 난감해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을 보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건가, 여덟살 어린 철부지랑… 나도 빨리 진지하게 결혼할 남자 만나서 정착해야 하는데 라는
나의 한국식 고질병 지랄병이 또 발동되어서 몇일 우울해하다 그에게 전화로 우리 그만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 얘 아니면 따로 만날 사람이 정해져 있지도 않으면서-
그는 어이없어 하면서 그러지말라고 했다. 왜 모든 것을 그렇게 끊어내냐고-
이렇게 만나다가 헤어질수도 있지만 우리 관계가 깊어져서 너 나랑 결혼할수도 있는거고 그렇게 가능성을 닫아놓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너랑 지금 마무리하기 싫고 마무리할 마음이 전혀없다며
본인도 혹시 우리가 사귀다가 헤어지게되면 너의 결혼적령기를 놓치게한 사람으로? 너에게 내가 안좋은 기억으로 남을까봐 너무 조심스럽다며
그래도 그냥 지금처럼 좋은 관계로 계속 지내면서 우리 더 알아가 보자 라고 말했다.
흠..이게.. 외국방식인가? 아님 그냥 별생각없이 심심하니까 나한테 이러는건가 모르겠지만
나도 나쁠것 없고 마음이 점점 생기고 있는 와중이라 그 제안을 수락했던 것 같기도-
나이 들수록 누군가와 시작하는게 너무 어렵고 무겁다.
왜 지난 일년간 만나고 스쳐간 모든 인연들이 다들 타이밍이 안맞는 거냐!
아무튼 그냥 물흐르는대로 살아보자~ 라고 생각하며
한국말 잘 못하는 바쁜 교포와 연애보다 조금 차갑고 썸보다는 많이 뜨거운 이상한 관계를 계속 유지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