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달살기 두번째 기록
처음 발리여행을 계획할 때 짱구, 스미냑, 우붓은 각각 일주일을 할애한 반면 길리는 유독 5일밖에 내어주지 않았다.
길리는 바다 옆 휴양지라 왠지 혼자서 가면 하루하루가 적적할 것만 같았고, 무엇보다도 잘란잘란 카페에서 길리에 대한 도시전설같은 괴담?을 너무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길리에 현재 담수 공급이 중단되어서 해수로 샤워를 해야한다는 말과 그 곳의 열악한 숙소 사정들,
길리에서 스노쿨링하다 해파리에 쏘이거나 고기에 물린 이야기, 물벼룩이나 베드버그에 온 몸이 물려서 링겔 맞은 이야기 등을 읽으며 오고가기도 힘든 섬인데 가지 말까도 오래 고민했었다.
길리에 가려면 우붓이나 짱구 등 머물고 있는 발리 본섬에서 길리로 가는 배가 출항하는 빠당바이 항구로 두세시간 차를 타고 이동해야한다.
그리고 빠당바이에서 배를 타고 또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을 가야한다.
발리의 열악한 도로사정과 트래픽, 대기시간 등을 감안하면 왔다 갔다 하는데 도합 이틀 정도는 날리게 된다.
그래서 발리에 짧게 여행 온 대다수의 관광객들은 길리를 과감히 패스하곤 한다.
하지만 외부에서의 접근도와 오염도는 반비례 하듯, 그만큼 길리에서는 청정 자연을 경험할 수 있다.
워낙 인구도 적고 산업이 없는 작은 섬이기도 하지만 특히 내연기관을 금지하여 섬 전체에 매연자체가 없다.
대신 비포장 도로위로 자전거가 지나다니면서 일으키는 뽀얀 먼지들이 있을뿐이다.
길리에 처음 도착했을때의 생경함이 아직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투명한 물색깔이야 대부분의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항구에 내리자마자 마치 어릴적 읽은 책을 통해 어렴풋이 상상만 해보던 아기자기한 옛날 동화속 마을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변을 따라 쭉 이어져 있는 작은 돌길 옆으로 마치 택시처럼 마차들이 승객을 태우기 위해 서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조개 껍데기로 만든 목걸이나 팔찌를 하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으며
나무판떼기에 나무나 조개 등으로 장식한 간판을 나뭇가지에 단 각종 레스토랑들이나 바 들이 해변을 따라서 쭉 이어져 있었다.
그 식당들은 백사장 위에 테이블을 몇개 놓고 각각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성 있는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해가 지면 각종 전구들로 조명을 밝혔다.
한국이나 유명 휴양지를 생각하면 으례껏 떠오르는 화려한 거대자본의 냄새는 전혀 맡을 수가 없고 이 작은섬에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는 그런 오래되고 정겹고 아름다운 가게들이었다.
해안을 끼고 길리섬을 한바퀴 쭉 도는 도로는 그나마 벽돌로 포장되어 있는 도로였기에 자전거 타기가 수월했지만
천천히 걷는 무수한 관광객들, 그리고 줄지어 다니는 자전거들로 인해 빠른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오히려 천천히 가면서 주변을 가만히 구경하면서 지나다닐수 있었다.
선착장과 각종 레스토랑, 바, 가게들이 있는 동쪽을 조금 벗어나서 북쪽이나 서쪽 해변쪽을 자전거로 달리면 사람이 적어서 달리기 훨씬 수월했고
더운 와중에도 자전거의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섬을 구경할 수 있다.
옆에는 해변, 오른쪽에는 푸른 나무들과 잔디, 각종 호텔이나 리조트들의 수영장들을 보면서 섬을 한바퀴 돌때면
왠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미처 스스로 청춘인 지도 모른채 생각없이 듣곤 했던 일본의 맑은 청춘 노래들이 무심코 떠올라서 혼자 흥얼거리곤 했다.
길리섬의 매력은 비단 이 해안가뿐만이 아니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서 숙소를 찾아가다 보면 - 숙소가 섬 가운데 사이사이에 위치해있다- 길리에 사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속으로 들어가게된다.
인공적인 손길이 한번도 닿은 것 같지 않은 흙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가끔 소도 만나고, 저녁으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염소들도 만나고, 토끼도 만나곤 한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집에서 키우는 애완닭들 몇 마리가 항상 길에 나와있어 앞을 가로막는다
한끼에 천오백원도 하지 않는 인도네시아 현지 식당들과, 그들이 가는 작은 구멍가게들, 빨랫방 등이 도로 곳곳에 위치해있다.
곳곳에 널부러져서 자거나 무심히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고양이들도 이 섬의 아름다움에 한 몫한다.
마치 고양이들이 점령한 섬인듯, 길가에는 한국에선 샵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품종묘들이 널부러져서 자거나 밥을 먹고있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 고양이가 의자위에 올라와 내 옆 동행인의 무릎 위에서 30분 가량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일도 있었다.
고양이가 싫어한다는 배를 만지고 찔러도 일어나 생각없이 깊게 자던 고양이를 보며 그만큼 동물들을 헤치지 않고 함께 살아왔다는 증거겠지 싶어 마음이 따스해졌다.
한국인이 유독 많이 오는지, 그곳에 사는 인니 사람들은 짧은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지나다니는 동양인만 보면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거부기거부기‘ (아마 한국인들이 매번 거북이 어디서 보냐고 물어봐서 다들 거북이라는 단어를 아나보다)라고 외치곤 했는데
처음엔 저게 캣콜링인가 하고 의심했지만, 곧 그들의 일상적인 인삿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도 안녕하세요 라고 항상 화답해주었고, 이 작은 섬에서 자전거를 타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이 남모를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길리 북쪽에서 - 윤식당 촬영지-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거북이가 많이 지나다니는 유명한 터틀포인트 - turtle point- 다.
스노쿨을 끼고 얕은 바다에 머리만 들이밀면, 한번 들어갈때 마다 밥먹는 거북이들을 두 세마리씩 보곤 했다.
매일 오전 파도와 물결을 따라 둥둥 떠다니며 몇 시간동안 식사를 하는 거북이들 옆에서 나도 함께 힘을 빼고 둥둥 떠있으면서
마치 내가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침마다 스노쿨링을 하고, 현지식당에서 밥을 먹고, 숙소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선셋을 보고 간단히 술을 마시고 자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나 뿐 아니라 길리에 여행온 대부분의 관광객의 일정이 비슷했다.
매일 아침, 점심마다 신선한 파파야, 망고, 아보카도, 용과 주스를 컵 가득 삼천원이 안되는 돈에 마셨고, 현지음식의 달콤한 땅콩맛에 취해있었다.
아무 걱정거리가 없어지는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노을은 매번 같은 색깔인 줄 알았던 나에게 길리섬은 매일 다른 모양과 색깔과 그림자의 노을을 선사했다.
정말 아름다운 노을은 해가 수평선이나 지평선에 사라지고 2~30분 이후에 생겨났다.
첫날은 pink coco라는 샛분홍색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선셋바에서 보았는데, 새빨갛게 불타는듯 작열하는 노을이 온 세상을 피처럼 물들이며 선셋바의 유난스러운 색깔을 덮어버렸다.
두번째는 선셋비치라는 곳에서 혼자서 백사장에 앉아 옥수수를 먹으며 보았는데 해가 지자 보라색의 노을이 하늘을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였다.
세번째 본 노을은 주황색과 녹색이었다. 태양이 없어진 뒤 주황색과 녹색이 띠가 하늘에 넓게 생기며 황홀경을 선사했고,
네번째 본 노을은 길리섬 완전 서쪽에서 보았는데 빨간색과 주황색을 물감으로 섞어놓은 색깔에 저 멀리 아궁산이 함께 보여 또 다른 경치를 선물했다.
해가 지면 길리섬은 금방 깜깜해진다. 나름 번화가인 항구쪽을 조금만 벗어나면 가로등 빛도 없기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수천개의 별들이 보인다.
동행인들과 선셋비치에서 노을을 감상후 술을 마시고 래빗점프라는 클럽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약간의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 음주자전거를 타고 번화가로 나오는 길에
그 중 한명이 우와 여기 별좀 봐! 라며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너나할것 없이 자전거를 멈추고 바로 옆 해변 백사장에 뛰어 들어가서 누웠다.
그리고는 가만히 누워서 별을 감상했다. 몇분간 저마다의 생각과 느낌으로 쏟아지는 별과 그곳의 경치와 여름밤의 온도를 소화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 청춘영화의 주인공 같다-‘고 말했을때 하니와 클로버 영화를 보며 설레던 스무살 무렾의 내가 떠올라서,
그 오랫동안 잊혀졌던 감정이 갑자기 예고없이 파도처럼 밀려와 달뜨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갈 수는 없지만 그 때의 그 아름다웠던 시절을 하루라도 온전히 흠뻑 느끼게 해준 이 섬에 감사했다.
길리에 있는 리조트들에서는 야외에서 영화를 매일 상영해준다. 백사장 옆의 리조트 사유 공간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매일 저녁 7시, 9시쯤 매일 다른 영화를 상영한다.
나는 떠나기 전날 방문해서 빈백에 앉아 맥주나 칵테일을 한잔씩 마시며 가만히 앉아서 영화를 봤다.
공기는 선선하고, 멀리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은 반짝이고, 나는 칵테일에 아주 살짝 취해서 빈백에 앉아있고, 저 멀리선 타이타닉이 상영되고 있었다.
렌즈로 본 일상들은 때때로 현실을 각색하고 보정하여 더 행복한 순간처럼 표현하곤 하지만
이 순간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지금 다시금 봐도 그때의 그 충만한 행복감을 담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역시 이번 여행중 정말 오랫동안 마음깊은 곳에 박혀서 잊혀지지 않을 행복한 기억 중 하나이다.
돌아오는 길은 역시나 고되었고, 카페에서 본 괴담 중 몇개는 실제로 경험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물에 들어가자마자 수십 수백마리의 떠다니는 해파리에 쏘여서 온몸이 따가워 보트 위로 올라온 경험도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인니 스노쿨링 가이드가 “따끔따끔?” 이라고 묻길래 너무 어이가 없이 웃겨서 쏘인 사실을 잊어버렸다.
가기 전 무서웠던 것들의 대다수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도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였음을 이 경험을 통해 알았다.
왜 매사 진지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온걸까.
마음속의 언제나 가장 반짝이는 빛 중 하나로 남을 보석같은 여행지 길리
내 나이 무렾 길리에 놀러왔다 이 곳에 반해서 길리에 정착해 피자가게를 차린 이탈리아 사장의 이야기가 거짓말같지 않았다.
나역시도 이 곳을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 배에 오르면서도 자꾸자꾸 뒤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