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정은 Jul 27. 2023

계절일기

눈사람 친구

어쩐지 아침이 기대되는 날이 있다. 겨울의 어느 밤, 소복하게 눈이 내리지 않을까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까만 창문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나무마다 흰 눈이 내려앉았다. 잎을 모두 떨어뜨려 앙상하던 나뭇가지는 그 나름대로 우아한 선들로 연결돼 운치가 있었는데, 흰 눈이 더해지니 더욱 선명하게 가지를 드러냈다. 새 한 마리가 푸드덕, 가지 위에 날아들자 눈이 후드득 떨어지고 만다. 커튼을 활짝 열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두 아이를 깨웠다.


"일어나, 눈이 내렸어!"


한 마디면 충분하다. 아침마다 잠과 씨름하는 아이들이 놀랄 만큼 가볍게 눈을 뜬다. 세상에 태어나 눈을 처음 보는 듯 신나서 창문에 붙어 눈을 바라본다. 불을 켜지 않아도 눈의 빛이 집안으로 들어와 제법 환하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자.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가자.


현관문을 열자, 설경이 펼쳐진다. 겹겹이 둘러진 나무 사이사이, 눈이 포개져있다. 바닥이 하얗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 흰색 이불이 덮였다. 썰매를 사두길 잘했지 뭐야. 부츠를 신고, 아파트 현관부터 썰매를 태운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위에 우리의 자국을 남긴다. 아파트 일층 단독현관에서 놀이터로 이어지는 약간의 경사면을 따라 썰매가 미끄러진다. 까르르 넘어가며 웃는다. 이제 덩치가 제법 커진 남매는 썰매가 비좁지만 누구도 양보할 기색이 없다. 서로 싸우면서도 절대로 내리지 않고 꼭 붙어 앉는다.


유난히 포근한 눈이다. 어떤 눈은 좁쌀만 하게 떨어져 손으로 뭉쳐도 힘없이 으스러지는데,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라서 솜처럼 송이가 커다랗다. 사방이 희고 아름다운 겨울을 우리 셋이 독차지하고 있는데 제법 커다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진다.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더니 아이들의 머리와 어깨, 무릎에 부지런히 쌓이기 시작한다.


연탄을 구할 수가 없어서 손으로 대강 눈을 뭉친다. 커다랗게 뭉친 뒤엔 바닥에 대고 굴린다. 굴리는 대로 두껍게 눈이 포개져 덩치를 금세 불린다. 저쪽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오는 사이, 눈사람의 크기가 생각보다 세 배쯤은 커졌다. 허리를 구부리고 눈을 굴린다. 바닥마저 깨끗한지 티끌하나 묻지 않고 하얗게 하얗게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다.


나뭇가지를 구해 팔을 만들고, 쭈글쭈글하지만 여전히 붉고 예쁜 산수유 열매를 따서 입과 단추를 붙인다. 나뭇잎으로 눈썹을 만들고, 코는, 아이들의 요청으로 냉장고를 뒤져 당근을 잘라 붙였다. 집 앞에 커다란 눈사람이 생겼다. 기온이 한참이나 올라가지 않아서 꽤 오랫동안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