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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Sep 08. 2020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었다. 워낙 유명하니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이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소설을 중간에 딴짓하지 않고 한 번에 쭉 읽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원체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다만 읽는 동안 사강이 이 작품을 썼던 연령- 사강은 이 작품을 18세에 썼다- 이나, 주인공의 나이, 정서, 작품이 선사하는 어떤 ‘분위기’ 등을 고려할 때, 좀 더 어린 나이에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최선은 10대 후반, 아니면 20대 초반에라도. 그랬더라면 훨씬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줄거리와 캐릭터 덕에 어느 때 읽어도 재미있는 소설이기는 하다.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어릴 적 엄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가던 17세의 세실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두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젊은 애인 엘자와 함께 휴가를 떠난다. 여름을 즐기며 연애도 하고 마음껏 술도 마시고 방탕하고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던 세실 부녀 앞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세실의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하던 여성 안이 등장하고, 아버지와 안이 사랑에 빠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

영리한 세실은 안이 일회용품처럼 잠깐 즐기다 교체되곤 하던 아버지의 여느 애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알 수 없는 불안과 불만을 느낀다. 알 수 없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는 어른에게 갖기 쉬운 반항심과 비슷하다. 기품과 예절을 중시하는 안은 세실 부녀의 방탕했던 생활에 마땅치 않은 기색을 종종 내비치고, 세실은 그럴 때마다 심한 모욕감과 반발심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세실은 안과 아버지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책략을 세우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소유욕과 충동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전 애인인 엘자와  잠깐의 일탈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실이 그와 같이 계략을 세우고 성공에 가까워 가는 동안 안은 점점 더 세실 부녀에게 마음을 열며 헌신하고, 그런 안을 바라볼 때마다 세실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지는 못하는데, 그로 인해 심한 괴로움과 내적 갈등에 휩싸인다.

이 소설은 그저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되는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가던 인물이 죄책감을 깨우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렇게 얻은 죄책감, 일종의 상처이자 ‘슬픔’은 결코 사라질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평생토록 함께 가는 감정임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성장소설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그러니까 제목의 <슬픔이여, 안녕>에서 ‘안녕’은, 바이 바이란 의미의 안녕이 아니라 헬로우에 가까운 안녕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10대에 읽었으면 훨씬 더 좋았겠더란 생각을 했던 것도 결국은 이것 때문이었다. 세실의 캐릭터는 무척 매혹적이고, 훌륭한 내면 묘사와 문장 덕에 여러모로 공감할만한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신체 상태나 정서가 일단 세실보다는 안이나 엘자에 더 가까웠던 탓에 세실에 완전히 이입하기는 어려웠다. 세실에 공감하는 것도 현시점에서의 공감이라기보다는 아, 나도 한때 저랬던 적이 있었지, 에 가까운.

물론 이런 지점을 고려하더라도 아주 재미있고 훌륭한 소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나에게 있어서는 책에 함께 실려 있었던 사강의 연대기 쪽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읽으면서 일전에 포스팅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천재적인 재능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성공을 한 점, 대중의 인기와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는 점, 지나칠 정도의 부와 사랑을 누린 탓에 결국은 파멸적인 삶으로 치달았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

18세에 쓴 첫 작품 <슬픔이여, 안녕>으로 엄청난 성공을 한 사강은 해당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문단으로부터도 인정받으며 일약 스타가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쏟아붓는다. 본래부터 충동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성품을 타고나 스릴과 스피드를 즐기던 사강에게 이와 같은 성공은 일종의 독이 되었는데, 술, 도박, 마약과 같은 여흥의 기회가 눈 앞에 마치 만찬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결국 사강은 새로운 작품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매일 밤 파티와 도박을 하고, 끊임없는 연애를 하며, 스피드를 즐기느라 자동차로 폭주를 하고, 그러다 사고를 당하면서 약물에까지 중독된다.

한때 그렇게나 큰 성공을 누리고, 많은 부를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약물 중독과 도박 등으로 사강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마흔이 넘어서는 친구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전전긍긍하는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렇게 망가진 그녀는 그녀의 오랜 팬이었던 한 여성이 거두어 보살피는데, 그 여성 역시 독점욕으로 사강을 자신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어릴 적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반짝이고,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던 사강은 그렇게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나는 한때 ‘애매한’ 재능이란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예 재능이 없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딴 길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애매하게 가능성을 보이면서 미련을 못 버리게 하는 것이 너무나 나쁘다고 여겼던 것이다. 특히나 글쓰기가 힘들게 느껴지거나 나보다 뛰어나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는 그런 생각이 더욱 심해지곤 했다.

그러나 요즘에 이르러서는 재능이라고 하여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엄청난 재능이란 일종의 복권 당첨과도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부, 지나친 사랑, 지나친 쾌락, 지나친 영광, 지나친 인기. 너무나 귀하고 드물고 특수한 운이 중복되어야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서 대개의 사람에게는 감당하기가 어렵고, 그 결과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은 않는 것이다.

무슨 작품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도 드래곤볼이었던가, 해리포터였던가 하여간, 육체와 정신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갖게 되면 육체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서진다는 내용이 있었다. 재능 역시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통찰, 충동, 예리한 감각, 매력, 뛰어난 지능 등은 그만큼 훌륭한 작품을 생산할만한 천재성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결국은 그 천재성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는 기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다큐멘터리에서 에이미 역시 그런 말을 했었다. “이 재능 다 없어지는 대신에,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거야.”

책의 겉표지와 속표지. 겉표지를 벗기면 이렇게 사강의 얼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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