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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Sep 19. 2020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 풍으로 쓴 오늘자 일기

베를린 일기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 풍으로  오늘자 한승혜의 일기 

 글은 아들이 태권도 학원 특강으로 잠시 집을 비운 틈을 (태권도 학원 만세다. 태권도 학원 관장님 충성 충성 충성), 남편에게 둘째까지 맡기고 침대에 모로 누워 이러다 담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베를린 일기> 읽다 말고 쓰고 있다.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 모르는 책이었는데  근래에만도  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읽어보게 되었다. 사실  번째 추천을 읽었을 때는 별로 끌리지 않았다. 평소  추천을 무척  하시는 작가님인데, 본인은 피식하는 정도였으나 그분의 중학생 아드님이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연령이  높다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있어빌리티를 지향하고 싶은지라 호기심이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있어  번째 추천사를 읽었다. 나의 이전 직장 동료분께서 너무너무 재미있고 웃기다고, 최민석 작가의 팬이라며 그가  책을 전부 소장하고 있다며 마구 자랑을 하는 것이다.

사실 타인이 하는 ‘재미있고 웃기다 말은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유머코드도 다르기 때문에. 하지만  동료분께서는 나의 책을 읽고 나서도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면 무척 믿을만한 훌륭한 취향 아닌가!!! 그런지라 이번에는 마음이 동해 읽어보게 되었다.

설마 하니 싶었는데 정말 제목 그대로 ‘일기였다. 최민석 작가가 레지던스(정부에서 지원하여 예술가들이 해외에 일정기간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형태) 작가로 베를린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편씩  일기를 묶어놓은 것이었다. 읽으면서 나도 일기    있는데.... 나도 일기 재밌게   있는데...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르면서.... 결국은 담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누워서 불편한 자세로 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여간, <베를린 일기> 읽다 보니 오래전 베를린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럽에 처음 갔던 것은 대학생 때였는데,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그것도 장장 3개월을 계획해서 다녀왔었다. 그런데 내가 겁도 없이 그런 계획을 세울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는 워크캠프라고 하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걸로 3주를 어떻게든 때우면  버틸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워크캠프 자체는 자원봉사이므로 참가비가 없으나 한국의 대행사는 사악하게도 40만 원의 대행수수료를 챙긴다. 그래도 3주에 40만 원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신청했었다. 그렇게 내가 택한 프로그램은 독일의 어느 지방 산골 성에서 열리는 축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고성에서 축제라니!!! 그것도 전 세계 각지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들썩이는 것이었다. 평소부터 망상의 화신이었던 나는 이미 유럽여행을 떠나기 3개월 전부터 영화 미드소마(그때는 미드소마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시길) 나오듯 머리에 화관을 쓰고 지역의 전통의상을 입고 해당 지역 주민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전통춤을 추는 나의 모습을 망상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성의 탑에서 바깥으로  창가에 머리를 내민 사진과 함께 “고성에서 잠드는 아름다운 밤.... 서울에 있는 친구들아, 행복하길.” 따위의 멘트를 곁들여 싸이월드에 올려 자랑을  생각을 하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듯했다.

그. 러. 나.

나의 원대한 망상은 워크캠프에 도착하는 첫날부터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관계자가 검은 얼굴로 축제가 취소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수가! 축제가 취소라니!!!! 미드소마 화관과 전통의상과 지역주민과의 어깨춤과 싸이월드에 자랑할 인증샷은 어쩌라고!!!! 심지어 축제가 취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유럽  참가자들 대부분은 캠프에 참여하는 것을 취소했다고 하여 본래 40-50 가까이
되어야  워크캠프의 참여자도 10명이  되지 않았다. 나는 크게 낙담했다.

그러나 일어난 일은 일어난 . 성에서 요양이나 하며  읽고 글이나 쓰자는 생각을 했는데, 다음날 아침  관리자가 나를 깨우더니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밖으로 내몰았다. 그러더니 수도관이  것을 정비해야 하므로 곡괭이를 주며 땅을 파라는 것이다. 어버버  틈도 없이 생전 해본  없는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데,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곡괭이질 하려고 유럽까지  것도 아니고,  시골에서 곡괭이질을 하며 3주나 보내야 한단 말인가!!!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보다 팔이 아팠다.

나는 돌아가서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러자 성의 관계자는 역시나 어두운 얼굴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이상 성에 머물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축제 준비를 하러  것이지  파러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참 했으나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만 포기한  내일 나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40만 원은 허공에 사라져 버렸다. 하여간, 일단 알겠다고 하긴 했으나 3주간 계획에 없는 방랑을 해야 하는 처지라 어째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성에 무슨 물건을 배달하러   독일 아저씨가 자기네 집이 포츠담이라며, 괜찮으면 포츠담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하여 옳다구나 하고 차를 얻어 탔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방랑은 일단 포츠담에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성에서 포츠담까지는 꽤나  거리였다. 차로 서너 시간 가까이. 나는 전날의 곡괭이질로  몸이 아파 조용히 잠을 자고 싶었는데 아저씨가 한국의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아 김정일에 대해 엄청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무말 대잔치라 뭐라 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질 않지만 대화 끝에 아저씨가 “고마워,  덕분에 한국의 분단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단다.”라고 말한 것은 기억난다.  자리를 빌어 한국의 남북 전문가들께 사과드린다. 나의 아무 말 대잔치로 인하여 독일의  아저씨  그의 친구와 동료들은 허위정보를 알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무튼, 그렇게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포츠담 선언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 포츠담이란 도시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가이드북도 없고 그때는 지금과 같이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해야 할지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는 것이다. 아무  없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아저씨가 자기네  소파도 괜찮으면 거기서 자라고 하길래 결국 그날 밤은   거실에서 묵게 되었다. 문제는 그날 새벽 곤히 자는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어나, 일어나, 귀에 속삭이면서.

잠결임에도 눈을 뜨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남자!!! 강간범인가!! 어떡하지? 내가  그랬을까!  모르는 사람 집에서 잔다고 했을까! 아씨, 모르는  일어나서 가방에 들어있는 주머니칼 꺼내와야 하나?  짧은 순간에 온갖 망상을 하다가 일단 일어나기는 해야겠어서 눈을 살짝 떠봤더니, 앞에 아저씨가 아주 태평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아저씨는 나에게 물었다.  대마초 피울래?

알고 봤더니 아저씨는 일종의 히피와 같은 사람이었다. 취미는 요가. 지금과 다르게 한국에는 요가하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고보니 식생활은 비건이었다. 성에서 내가 저녁식사를 준비한 적이 있는데 고기를  먹는다 하여 한국서 준비해 간 오뚜기 카레를 끓여주었다. 흠.... 성분 표시는 살펴보지 않았지만..... 고기가..... 없었기를 바란다. 아무튼 그런 아저씨가 살고 있는 집도 친구들 여러 명과  함께 사는 대안공동체 같은 건물이었다. 대마초는 어디서 났냐니까 마당에서 재배했다고.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와서 ‘대접하는 차원에서 꺼냈다며. 그러니까 교통편도 제공하고, 숙소도 제공하고, 대마초까지 제공할 (!) 했던 매우 친절하고 관대한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잠깐이지만 강간범으로 오인하고. 미안합니다.

다음날에는 친절한 아저씨의 배웅을 받으며 포츠담 바로 옆의 베를린으로 향했다. 드디어 베를린에 입성한 것이다! 핫한 도시 베를린!! 힙한 도시 베를린!!! 핫하고 힙한 것과는 별개로 계획에 없던 3주에 해당하는 숙식비가 나가게 생겼던 지라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고, 그래서 가이드북에서 가장 저렴한 도미토리를 찾아갔는데 거대한 체육관 같은 공간에 침대가 32개가 들어있는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모래가 꺼끌꺼끌 섞여 있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군데군데 스프링이  꺼진 침대에 누워 차라리 곡괭이질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기.....한국인이세요?”

돌아보니  여성분이 그날 베를린에 왔다며, 괜찮으면 나가서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우리는 베를린 시내를 정처 없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다르게 직장인이었고, 베를린에서 시작하여  달을 여행하는 일정이라 했다. 그런데 길눈도 어둡고 혼자 다니는 것도 무서운데 왠지 내가 아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엄청 길치인데요....그러고 있는데 문득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베를린은 클럽으로 엄청 유명하다던데.”
 맞다. 저도 들은  있어요.”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요?”
완전 궁금해요.”
사실 아까부터 가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무서워서  가고 있었거든요. 근데 같이 가면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같이 갈까요? 저도 가보고 싶어요!”

그렇게 우리는 ‘하다는 베를린 클럽을 구경할 생각에 무척 들떠 있었다. 날은 몹시 추웠고, 배도 고팠으나 흥분한 우리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가   길치였다는 . 베를린이 클럽으로 핫하다는 사실만 알고 클럽이 베를린의 어느 지역에 있는지, 어느 클럽이 핫한지도 모른채 클럽에 가겠다며 베를린 시내를 돌아다닌 것이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클럽은 보이질 않았고 답답했던 우리는 걸어가던 행인을 붙들고 “혹시 클럽 어딨어요?” 하고 물었는데 그럴 때마다 행인들은 몹시 난감하고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연하다. 클럽 근처도 아니고 그냥 베를린  지역을 돌아다니며 클럽 어딨냐고 부르짖었다니. 서울역 주변이나 광화문 등지를 배회하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한테 클럽 어딨냐고 묻고 다닌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시간 가까이 헤맨 우리는 그냥 술이나 마시자며 아이리시 펍에 가서 흑맥주를 마셨고 술에 취해 숙소에 돌아가 석회가 섞여있는 꺼끌한 물로 샤워를 하고 스프링이 꺼진 침대에 누워 잤다. 다음날 친구가 소개해준 독일 현지인 대학생 친구가 기센이라는 지역의 자기네 집에 일주일 동안 있어도 된다길래 그리로 가면서 결국 베를린 클럽은 가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

*
밑도 끝도 없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베를린 일기> 무척 재미있다. 중간 중간 개저씨스러운 유머가 간혹 등장하는 부분이 있으나, 용인할만한 수준. 코드가 유난히 맞는 사람들은 무척 재미있어할 책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듯이 읽지 않는 사람은  읽지 않을 것이지만. 남편에게 중학생도 재미있게 읽었다며 읽어보라 권유했으나 거절 당했다.

아들이 돌아왔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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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는 교통사고를 겪으며 인간의 목숨은 유리잔처럼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버릴  있다는 것을 극히 일부로나마 맛보았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기록하고, 나누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에 남겨진 길을 기쁨을 찾아 떠나는 지도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순간 느끼고 있다. -p.75

밤은 일찍 오고,  밤은 길다. 이곳에서의 나의 일상 대부분은 어둠이 차지한다. 그렇다 해서  일상을 거절할  없다.

때로 일상은 살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살아 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때로  일상이 다시 살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살아 내야 하는 오늘늘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소중한 날로 이어지는 다리는 필시 평범한 날이라는 돌로 이뤄져 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하나를 쌓은 밤이다.

필요한 날이었다.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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