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이번 달에 쓰는 원고 중의 한편에서 황정은의 <연년세세>를 다루었다. 그러면서 어제 한번 더 읽고.
평소보다 원고 쓰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는데, 아마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랬던 것 같다. 힘을 적당히 빼야 되는데, 그래야 읽기도 편하고 좋은 글이 나오는데,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서서, 이 책의 훌륭함을 어떻게든 더 잘 전달하고 싶어서 허둥대다보니.
이 책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지라 처음 읽었을 때에도 아무런 코멘트를 남기지 못했다.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너무 좋아해도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이 짧은 한 권의 소설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평범한 한 가족을 통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줄 읽기 전에는 나도 미처 몰랐다. 아마도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황정은의 작품이 늘 그렇긴 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가족이 주는 보호의 울타리와 굴레, 의무와 책임이 주는 성취감과 부담감, 원망과 분노, 용서, 끝내 용서할 수 없는 것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남는 연민 등. 살면서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이겠지만. 이해하고 싶어서, 혹은 이해받고 싶어서.
그렇지만 세상에는 이해는 되어도 용서는 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용서는 하지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는 것들도 존재하고. 미워하면서도 가여워할 수도 있고. 원망하면서도 고마워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사실 한 인간에게 다른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황정은 작가의 팬이다. 쓴 책은 모두 가지고 있고 모든 작품을 좋아한다. 사실 그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인간의 추함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어리석음, 연약함, 이기심을 모두 알고 있고 때로 그에 환멸을 느끼고 그것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실제로 그는 “사람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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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p.68-70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p.142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 그 두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p.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