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나와 친해지는 중
의, 식, 주 중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한다면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식이다. 나는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야무지게, 남들보다 많이 먹는 쪽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먹었다. 내가 숟가락을 들면 우리 집 식구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어릴 때는 엄마가 숟가락을 들고 다니며 밥 좀 먹으라고 야단인 아이였다. 주변 친척들이 엄마를 볼 때마다 소말라야에 사는 아이-이 얼마나 여럿에게 예의 없는 발언인가 싶지만- 같다고 타박하고, 엄마는 그 타박을 제일 싫어했다. 그런 애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넘어가던 시점에 밥맛에 눈을 뜨더니 입 안에 넣는 모든 게 맛있어졌다. 내가 미친 듯이 먹기 시작하자 엄마가 제일 좋아했다. 엄마뿐만이 아니라 주변 어른들 모두 나를 너무 기특해했다. 나는 더욱 많이 먹기 시작했다.
먹고 보니 운이 좋게도 먹는 만큼 살이 찌는 체질도 아니었다. 진짜 다른 애들에 비해 배는 먹는 데도 반에서 제일 마른 축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 모든 여자아이들이 다 살을 빼도 나는 다이어트와는 영 거리가 먼 아이였다. 그 말인 즉, 내 입에 집어넣는 모든 것을 말릴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성인이 되고, 혼자 돈을 벌기 시작하자 한이 쌓인 양 먹거리를 찾아다녔다. 유니크한 맛집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2시간이 가까운 웨이팅도 기다려서 맛은 다 보고 다녔다. 해외여행 가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식당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점심에 뭐 먹지 고민하고 점심에는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한 끼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자애들은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는데 나는 싹싹 비웠다. 20대 후반이 넘어가자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래도 딱히 먹을 것을 내가 금한 적은 없다.
딱 한 번, 내가 먹을 것을 금한 적이 있다. 레몬 디톡스가 유행하자, 나는 정말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건강해지려나 싶어 레몬물 일주일 먹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이틀이 지나가자 영양도 디톡스가 됐다. 삼일이 지나자 얼굴에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고 오히려 트러블이 났다. 나는 바로 탄수화물을 먹었다. 그 뒤로는 먹는 것이 나에게 더 중요해졌다.
요상한 건 최근 1년 들어 급격히 밥 먹기가 싫어졌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마음이긴 했지만 밥 먹기가 귀찮고 싫어지다니. 지난 25년 간 없던 일이었다. 그것은 뭔가 나에게 인생 한 텀이 끝났다는 선고 같았다. 아무리 불안정해도 밥이 싫어진 적은 없었으니까. 근데 정말이지 위가 더 이상 과로시키지 말라고 광광 선언하는 기분이었다. 입 안도 까끌하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 식당에서 여자 공깃밥을 적게 주는 것을 제일 혐오했는데 점차 밥양이 줄어서 진짜로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는 여자가 됐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희가 줄어든 느낌이다.
밥양이 줄어들고 나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위와 장에게 과로를 시켰는지 느껴졌다.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일주일에 3번은 매운 것을 먹고, 소화도 잘 못 시키면서 상 위에 올라온 것은 바닥을 보일 때까지 수저를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고생해 온 내 위장들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창 올라왔던 살이 금세 빠져서 20대 초반 몸무게로 돌아갔다. 나이가 들어서 체질이 변한 줄 알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줄곧 말랐었으니. 원래는 이게 그냥 내 체질인 것을 먹는. 것이 너무 좋다는 이유로 마냥 무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속이 편안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많은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간이 진짜로 받지 않는데 맛있다는 이유로 억지로 먹던 술도 내려놓고, 사회성이 떨어지면서 최대한 잘 놀겠다는 호기 하나로 밖을 싸돌아다니며 친구들을 미친 듯이 만나고 다니는 것도 그만두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밥까지 내려놓았다. 10대 이후로 나는 최대한 내가 가진 기질에서 벗어나려 용을 썼는데 종국에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용쓰는 게 지친 걸까? 그저 그런 때인 걸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요즘에는 나 스스로 너무 예상 밖의 행동을 하므로(사춘기보다 심하다. 사실 40대로 넘어가는 즈음에 오는 게 사춘기가 아닐까?) 모든 것들이 당황스럽다. 나이가 먹으니 나이가 먹는 것에 적응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더 좋아지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저 이 시기를 잘 버텨내길 바랄 뿐.
이제는 나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오랜 친구의 몰랐던 면을 알게되는 것 같다. 이제 진짜로 나는 나와 친해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밥이 너무 맛있어 질지도 모르지. 혹은 평생은 몰랐던 야채의 단 맛에 눈뜨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좀 떠버린 느낌도 있고) 혹은 내가 절대 먹지 못하는 고수가 맛있어지는 거 아닐까? 내 일생과 거리가 멀었던 운동이 좋아질 수도 있고. 공포영화 마니아가 될지도. 무엇이든 반신반의하는 삶을 살았는데 드디어 어떤 종교나 믿음에 정착하게 되려나? 그러면 또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글을 쓰겠지. 제가 이젠 이런 짓까지 한답니다, 하고. 생각만 해도 우습다. 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