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그랩 없던 시절 나의 등하교를 책임져주셨던 쎄옴 아저씨
쎄옴(xe ôm)은 오토바이 택시다. 지금은 그랩 같은 어플이 많이 발달해서 앱을 통해 쉽게 잡아 탈 수 있지만, 그랩이 없던 시절에는 길에서 랜덤으로 쎄옴을 잡아 타곤 했다. 검지손가락을 쭉 펴서 '가능하냐', '가능하다'는 수신호를 주고받고 목적지에 맞는 금액을 흥정한 뒤 탔다. 길에 쎄옴이 없으면 어떡하냐 싶겠지만, 집 앞에서부터 유동인구가 있는 곳에는 어느 곳에서나 오토바이 위에서 여유롭게 대기하고 있는 아저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검정고시까지 치르고, 필리핀 선생님들이 운영하던 대안학교를 거치고 나서도 나는 17살이었다. 이쯤 되니 언어는 그렇다 치고 정말 제대로 된 교복을 입고 또래 친구들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집에서 왕복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곳의 작은 국제학교를 소개받아 청강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오전에는 베트남어로 오후에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 학교였고 이곳에서 나의 베프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후에 풀겠다.)
문제는 매일같이 등하교를 해야 하는데, 집에서 학교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버지가 매일 데려다 주실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없다. 택시는 가격도 비싸지만 출퇴근시간에는 길이 너무 막혀 시간이 배로 들었다.
당시 우리 아파트. 입구 앞 쎄옴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있는 곳에서, 아빠는 한 분을 섭외했다. 정해진 등교시간에 맞춰 매일 나를 학교로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으로 매달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
아저씨는 통통한 체격에 푸근하고 잘 웃는 선한 인상을 가진 아저씨였다. 당시만 해도 뚱뚱한 베트남 사람들이 드물었기에 친근한 이미지가 눈에 쉽게 띄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아저씨를 주로 '쎄옴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저씨의 머리는 곱슬거려서 기르면 아프로 폭탄머리가 되었다. '올드보이'에 최민식 배우의 머리와 흡사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르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쯤 빡빡 깎고는 나타났다. 그리고 항상 무늬가 있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었다. 몸을 가리는 '옷'의 의무를 간신히 행하고 있는 그 셔츠는 팔 부분이 찢어져 있었지만, 아저씨는 개의치 않았다.
아저씨는 상당히 외향적이며 술을 좋아하는 아저씨였다. 저녁에 보면 항상 동네 아저씨들과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크게 웃고 있었다. 아빠가 술 냄새가 나는 아저씨에게 크게 화를 낸 이후, 아저씨는 나를 태울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전날 술을 많이 마신 아저씨가 숙취로 늦잠을 자는 경우는 꽤나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도 먹을 수 있었는데, 친구들과 같이 아침을 먹는 시간이 좋아서 나는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해가 미처 다 뜨기도 전인 5시 30분에 출발했다. 그 시간에 아저씨는 오토바이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내가 전화를 해야 어디선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퉁퉁한 아저씨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굉장히 잽쌌다. 40분 거리인 학교를 25-30분 안에 데려다주었다. 한 번은 50분은 걸리는 공항까지 30분이면 간다며 자신만만해하더니 정확히 30분 안에 왔다며 의기양양해했다.
등하굣길에 그렇게 아저씨 뒤에서 해가 천천히 밝아오는 한적한 거리를 달리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겁 없던 어린 시절엔 그 시간들이 좋았고, 힘든지도 몰랐다.
아저씨와의 인연은 1년 이상 이어졌는데, 아빠는 아저씨가 저축을 잘했다면 진작에 새로운 오토바이를 샀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적지 않은 고정수입이 있었던 것인데, 아저씨는 술을 마시느라 여기저기 성한 곳 없는 오토바이는 업그레이드는커녕 다운 그레이드되기 일쑤였다. 타던 오토바이는 어디다 두었냐는 아빠의 물음에, 아저씨는 씩 웃으며 팔았다고 했다.
오랜 시간 나를 데려다주던 아저씨는 어느덧 나의 보호자가 되어주기도 하셨다. 학교가 끝난 뒤 친구들과 약속이 즉흥적으로 잡힌 날, 더 놀고 들어갈 거라고 죄송하다며 나를 데리러 온 아저씨에게 먼저 돌아가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에게 허락은 맡았느냐고 물었다.
우리 집 분위기는 '허락'을 맡을 필요는 없었고, 장소와 시간만 잘 알려드리면 오케이였기에 아저씨의 단호한 말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친구들도 아저씨가 보호자처럼 엄하다며 의아해했다. (그냥 다시 돌아가기 귀찮아서 그러셨을까?)
생각해 보니 아저씨가 나와 우리 가족을 단순히 손님을 넘어서 친구처럼 가족처럼 소중히 생각해 주셨던 것 같다. 항상 흔쾌히 우리를 시장으로, 약속장소로 태워다 주었고, 마주치면 살갑게 인사했다.
그렇게 나는 1년 정도 후, 청강생으로 다니던 그 학교를 그만두었고 우리 집도 이사를 했다. 아저씨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 후에도 간간히 전화하면 아저씨는 달려와 주셨지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졌기에 천천히 교류가 줄어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19살이 되었고, 영어 과외 알바를 하던 오빠가 좋은 알바자리가 있다며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부유한 한베 가정의 6-7살쯤 되었던 쌍둥이 남매를 돌봐주면서 한글을 가르쳐주는 알바였다. 유독 소심하고 내향적이었던 나는 아이들과 친근하게 놀아주는 법도 잘 몰라서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높은 페이와 간절히 바라시던 아버님에 용기를 내서 시작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에, 쎄옴 아저씨에게 연락해서 부탁드렸다.
하지만 너무 어린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건 쉽지 않았고, 나를 고용한 것에 대해 의견이 갈렸던 학부모의 갈등과 기대했던 나의 역할이 충분하지 못 하자 아버님은 결국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다며 한 달도 못 채웠던 기간의 아르바이트비를 담은 봉투를 내게 쥐어주며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
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라는 압박과, 나에게 너무 많은 돈을 주는 남편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다며 못 마땅해하던 아내분, 그리고 짧은 시간 정이 들었던 아이들.
결국 마지막 해고를 통보하며 난감해하던 학부모의 표정과 선생님 이제 안 오냐고 묻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당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내가 못하고 싶어서 못한 게 아니라고, 최선을 다 했다고 나를 위한 변명이라도 아니면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 손에 쥐어진 그 흰 봉투가 너무 치욕스러웠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저씨가 내 표정을 보고 왜 그러냐 물었다.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고 꺽꺽 거리며 울었다. 당황한 아저씨는 어쩔 줄 몰랐고, 나는 울면서도 헬멧을 쓰고 어서 가자고 했다. 아마도 아저씨는 내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보고는 짐작을 하신 듯했고, 가면서 나는 일 더 이상 안 간다고 말해드렸다.
그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눴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는 걱정 어린 표정 자체가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이후 쎄옴 아저씨를 찾는 일이 줄어들었고, 아저씨도 다른 일이 더 많이 생겨 우리 가족과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쎄옴 아저씨처럼 외국인인 우리 가족을 정으로 대해주던 사람을 만났음에 감사함을 되새긴다. 아저씨 덕분에 나는 학교를 다니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첫 알바의 첫 출근길도 마지막 해고까지도 외롭지 않았다, 연락처를 잃어버려 연락할 수 없지만, 이제는 술은 그만 드시고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