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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Dec 27. 2019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83년생 김태하

나의 삶에 ___이 배달되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82년생 김지영’, 주변에 꼭 한두 명쯤 있을 법한 이름 ‘지영이’ 그리고 나와 비슷한 나이, 아마도 같은 시절을 관통해 온 또래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집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삶의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는 주인공을 관조하는 성장 드라마 부류의 소설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르포르타주에 가깝게 느껴졌다.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선명해서 문장을 읽어내려가는 곳곳에서 '지영이'의 삶에 묻어나는 고단함이 생생하게 아렸다. 최근 동명의 영화로도 개봉해 약 370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는데 보고서에 가까운 서사를 공감 가는 드라마로 잘 연출해서 보는 동안 그때의 감정을 다시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지영이'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의 주인공을 통해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여성으로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야 하는 내 주변 친구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으로 성장해온 그들의 힘겨운 이야기는 남성으로 자라온 나는 사실 경험하기 힘든 부분들이 다수였다. 그래서 공감하기 어려운 어떤 부분들은 지나치게 편향적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 마디마디에 이를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신문 기사와 데이터들을 통해 흐릿하게 보이던 고통스러운 단면을 실체화하며 내가 가진 약간의 적대감도 서서히 누그러트렸다.


내가 성차별에 대하여 인식한 것은 어렸을 적부터였다. 명절이면 난 동생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호의를 받았다. 어른들은 아무렇지 않게 ‘아들’, ‘남자’라는 단어들을 남발하며 동생과 나 사이에 선을 그었다. 내가 성장해온 TK 지역은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했기 때문에 분명 어른들의 태도에는 성별에 따른 서열의 저의가 기저에 깔려있었다. 물론 나 또한 더 많이 누리는 것이 큰 부담으로 돌아와서 마냥 좋지는 않았지만, 차별을 일상처럼 받아오며 성장한 동생이 받았을 고통보다는 덜 했을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이 성장 과정에 내가 의식적으로 행한 게 아니라 어른들의 편의에 의해 강요되고 무의식적으로 교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동조한 면이 있기 때문에 동생에게는 늘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러한 불평등에 나만의 방식으로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가정 형편이 급속도로 안 좋아져 용돈이 이내 끊기기 시작했는데 언제나 선택권의 박탈은 동생에게 먼저 일어났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급식비를 몰래 빼돌려 옷을 사거나 유흥비(?)로 쓰기 위해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행위가 이뤄졌는데 그 작은 일탈에 동참하였다. 물론 그렇게 벌어들인 불법 자금을 전부 동생 서랍에 몰래 넣어두었다. 사춘기 여자아이가 챙겨야 할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단순한 미봉책이었고,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동생의 자존심에 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른인 척 행세를 해도 나 또한 어린 영혼에 불과했으니 섬세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참 배고플 나이에 점심을 굶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에 내심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설익은 생각이 앞서고 말았던 것 같다.


둘 다 성인이 된 이후에 어느 날 잔뜩 취한 목소리로 울면서 전화한 동생은 몇 시간을 수화기를 붙잡고 자신이 부당하게 차별받으며 살아온 날을 원망하였다. 기억도 할 수 없는 사건들, 상황들이 쉴 새 없이 열거되었다. 사소한 이유라고 치부되는 것조차 동생에게는 가슴에 박힌 못이었다. 목수는 내가 아닐지 몰라도 망치는 되었으리라. 분명 지나간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막연히 불편한 마음을 지우고자 베푼 호의나 세심하지 못한 태도가 오히려 자신의 부당한 차별과 나약한 모습을 더 드러나게 했을까?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은 상처가 평생 한으로 남아 마음을 병들게 한 슬픈 현실 때문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상처의 깊이에 나 또한 밤새 울고 말았다. 아직도 그날의 새벽을 생각하면 가슴을 저린다.


친구, 직장 동료들 등 주변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심심치 않게 여성 비하적인 발언이나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여자니깐’, ‘여자가 무슨’, ‘여자 직원은’ 등 이런 단어들을 꼬리표처럼 쉽게 붙이는 행위에서 그들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에 의아해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서열의 우위를 후순위로 결정짓고 배타적으로 적대시하는 행위의 폭력성을 느끼지 못한다. 남성이라는 편의성에 머무르며 차별이 허용되는 비뚤어진 환경에 살아왔으니 충분히 관습과 관성에 사고가 지배당할 법하다. 분명 나 또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보다 한 발자국 나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생각과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말의 노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클 것이다. 비뚤어진 관성에 지배당하기 십상이니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생각과 태도에 경계를 기울이는 반작용 에너지를 내야 한다. 그렇게 성을 넘어서 서로가 존중받는 길을 모색했으면 한다. 우리 시대의 김지영이 온전한 김지영으로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서로 동등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함께 나아가길 염원한다.



+더하기
어찌 되었든 우리는 무한히 넓은 우주에서  공간인 지구에 살고 있다. 인간 이외에 생명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니 망망한 우주에 우리 밖에 없다. 위로, 위안, 격려, 사랑 등등 온기를 나눌 생명체는 우리뿐이다.  격렬히 안아도 모자란 곳에서 아웅다웅 살고 있다. 범우주적으로 바라보자. 세상이 달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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