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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별 May 18. 2022

위스키처럼 마실 수 있는 포트 와인

세그라도 핑크포트

  위스키 중 잭다니엘 허니를 제일 좋아한다. 잭다니엘보다 도수가 낮지만 꿀 향이 첨가되어 있어 좀 더 달달하다. 잭다니엘을 알게 된 건 남자 친구 덕이였다. 느긋한 기질에 혼자서도 알차게 잘 노는 내 남자 친구는 꽤 오랜 시간 여자 친구가 없었다. 남자 친구의 친구들이 하나 둘 장가를 가고 그렇게 남자 친구만 혼자 미혼일 무렵 친구들이 생일 선물로 준 게 잭다니엘 허니였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기념일 때 마시라는 의미로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의 선물이 무색해질 정도로 선물을 받은 후에도 내 남자 친구는 오랜 시간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혼자 지내다 만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처음으로 남자 친구 집에 놀러 간 날 남자 친구는 너스레를 떨며 잭다니엘 허니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이 술 언제 먹을 거냐, 너 무덤에 잭다니엘 허니랑 같이 들어갈 것 같다는 오랜 친구들의 농담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그리고 기념일도 아닌 어느 평범한 날 나의 호기심에 잭 다니엘을 드디어 먹게 된 것이다. 대기업의 회식 자리로 단련된 남자 친구는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술을 그렇게 잘 마시지 못하는 나는 언더락 잔에 담아 마셨다. 마시기도 전에 잭다니엘의 향긋한 꿀 향기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마시고 난 후 입안에 감도는 향도 참 좋았다.

   그 후 스트레스를 왕창 받은 날이 있었다. 누구의 잘 못으로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닌 상황이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그런 날. 평소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언가 사야 기분이 풀리는 안 좋은 소비 습관을 가진 나는 당장 눈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뭘 사야 내 마음이 위안을 받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잭다니엘 허니가 눈에 보였다. 평소 같으면 가격표를 한참 살피고 샀을 걸 그날은 가격표도 보지 않고 구매했다. 토닉워터와 콜라도 함께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한 후 집에 있는 간단한 핑거 푸드와 함께 잭다니엘 허니에 토닉워터와 얼음을 넣어 하이볼을 만들어 마셨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짤그락 짤그락 소리를 들으니 이유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고 약간 알딸딸해진 기분에 나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뒤로도 간혹 기분이 안 좋은 날 잭다니엘 허니를 찾고는 했다.

  

세그라도 포트와인



잭다니엘 허니를 좋아하는 나에게 와인이 가진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한 번 뚜껑을 열면 빠른 시일 내에 와인을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위스키처럼 몇 달을 두고 밤에 조금씩 마시기 어렵다. 잭다니엘 허니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와인에 대한 아쉬움을 느낄 때쯤 방앗간 들리듯 가는 와인샵 사장님이 포트와인 하나를 추천해주셨다. 세그라도 핑크포트라는 이름의 와인이었다. 포트 와인은 와인의 당분이 알코올로 바뀔 시점에 높은 도수의 브랜디를 넣어 달달하면서도 도수가 높게 만든 와인이다. 사장님은 도수가 세니 온더락잔에 포트 와인을 따라 마실 것을 추천해주셨다. 온도에 민감해서 와인잔을 잡을 때 와인의 보울도 잡지 말라고 하는 게 와인인데 얼음을 넣으라니. 신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와인은 코르크 마개 뚜껑을 한 번 따면 바로 먹어야 하는데, 이 포트 와인은 오랜 시간 걸쳐서 먹어도 된다니 위스키가 따로 없지 않은가.

  세그라도 포트와인을 소중하게 안고 집에 온 날은 잭다니엘 허니를 산 날처럼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이 나 들린 와인샵에서 포트 와인을까지 발견하고 와 더 흥이 난 날이었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밤 9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밤에 형광등을 모두 끄고 스테인드 글라스 공방에서 만든 무드등 하나만 키고 책 읽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 마시는 술은 평소보다 더 달고 맛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내일 출근할 준비를 마치니 기다리던 밤 9시가 되었다. 계획대로 형광등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놓으니 아늑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온더락잔을 꺼낸 후 포트 와인을 담았다. 차갑고 달고 잔잔한 향의 여운도 남아 색다른 와인이었다. 그렇게 얼음이 들어있는 잔을 달그락 거리며 달달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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