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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고 처음 마셔본 맥주는 맛이 없었다. 나는 그전까지 청소년들에게 금기시되던 술을 한 번도 입에 대본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술에 대한 환상이 컸다. 마시면 기분이 엄청 좋아진다거나 다른 음료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순진했다. 나의 기대감만큼 맥주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술자리도 나와 맞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술자리는 굉장히 시끄러웠고 알맹이 없는 말들이 오고 가는 곳이였다. 소주는 더 싫었다. 소주는 과학 실험용 알콜을 마시는 기분이였다. 얼굴에 지을 수 있는 인상이란 인상은 다 지은 내가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소주는 다들 무슨 맛으로 먹냐고. 나의 질문에 친구는 낄낄 웃으며 나를 보고 순진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고 소주는 더 빨리 취하려고 마시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하며 속으로 볼멘 소리를 했다. 맛도 없고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는 소주는 맥주보다도 좋아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술이란 적당히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주는 음료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편의점의 냉장고 칸에 처음 보는 캔들이 진열되있지 않은가. 처음 보는 디자인의 캔이 신기해서 얼굴을 냉장고에 바짝 갖다 대었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간간히 보이는 beer라는 단어와 보리 그림을 보고 직감적으로 맥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맥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날부터 편의점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사 왔다. 술이 별로진 않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난 그중에서도 코젤을 제일 좋아했다. 코젤은 마시자마자 본능적으로 이건 내가 좋아하는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맥주집에서 파는 시나몬 가루를 묻혀서 먹는 코젤 맥주는 더더욱 좋았다. 주종이라는 단어도 몰랐던 대학생 시절 나의 주종은 코젤 맥주였다.
직장인이 된 후 나의 주종은 소맥이였다. 맥주만 마시기엔 뭔가 아쉬웠다. 대신 빨리 취하고 싶은 만큼 양을 조절해가며 소주를 넣어 마시는 게 좋았다. 그래도 나에게 술자리는 여전히 썩 즐거운 곳은 아니였다. 간혹 위스키나 칵테일을 마시기는 했지만 나도 나의 친구들도 소주와 맥주를 제외한 다른 종류의 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크리스마스 홈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친구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중 유행에 빠른 친구가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이 어떻겠냐고 했다. 우리 셋 다 동의했고 내가 와인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원하는 와인을 콕 집어 사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나에겐 꽤나 충격이었는데 맥주와 달리 와인은 쉽게 살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설사 판다 해도 내가 구하고 싶은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설상가상 미성년자들이 술을 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터넷으로는 주류를 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와인 전문샵을 조사하던 중 파스쿠아 일레븐이 입고된 곳을 찾게 되었다. 다행히 가게 위치도 익숙한 장소였다. 와인샵에 무작정 방문하기 전에 먼저 해당 가게의 SNS 계정에 연락해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을 예약했다. 와인샵에 내가 구하고 싶은 와인의 재고가 있을 때 예약은 필수다. 인기 제품은 다른 사람들이 사가버릴 위험이 있고 해당 와인이 언제 입고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약해놓은 와인을 일주일 내로 찾아가 픽업해 오면 된다. 그렇게 내 생애 처음 와인이라는 것을 구매해보았다. 누군가는 와인을 사는 과정이 번거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소 유별난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와인을 샀다는 묘한 성취감과 와인을 구매하기 위한 약간의 수고가 재밌었다. 게다가 단조로운 것을 싫어하고 복잡 미묘한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와인은 묘한 흥미를 자극했다. 그 뒤로 나는 와인에 푹 빠지게 되었고, 와인샵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와인 리스트를 보며 와인을 예약하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주종이 뭐냐고 나에게 물어보면 씩 웃으며 말한다. 저의 주종은 와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