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뮈르달 봄 컬렉션 - 음악
매일 새로운 음악을 하나만 발견해도 좋은 하루라고 믿고 있었다.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미나리님,
저는 이 문장을 참 좋아합니다. 암, 그렇고 말고.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이에요. 이런 저에게 최근 참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지금도 두근거리네요.)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5년 4개월이 막 지난 아들 녀석으로부터 새로운 노래 한곡을 추천받게 된겁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제가 그동안 몰랐던, 처음 듣는 노래였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노래가 저희 부부의 마음에 쏙 들어서 요즘 매일 듣고 또 듣고 그러고 있다는 것이에요.(남편은 통화연결음 배경음악으로 걸어놓음) 여기서 더 놀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려 BTS의 노래인 것이지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남았어요. 이 노래는 쉽게 들을 수 있는 BTS의 인기곡이 아니라, 바로 숨겨진 보석 같은 진(Jin)의 솔로곡이라는 사실입니다.
< The Astronaut >
전주가 시작되고 첫 소절이 들릴 때 저는 이미 예감했지요. 나는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곧바로 자세를 바꿔 아들이 틀어준 뮤직비디오 영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와아, 매우 잘생긴 청년이었어요.(이제 와서야 6세 아들을 통해 BTS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배웠음을 고백합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1분 30초쯤이 지나면 이 청년이 달리기 시작해요. 어느새 저도 함께 달리다가 숨이 차오르면서 노래가 끝나지요. 이대로 계속 달리고 싶어지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이 노래의 마지막에는 항상 여운이 남습니다. 여느 아이돌 가수들과는 조금 다르게 아주 담백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예요. 뽐내는 기교가 없어서 편안하고 듣는 내내 마음이 뿌듯해져요. 열심히 노래 부르는 친구와 함께 노래방에 있는 기분이랄까.
진(Jin) 청년에 대해서 더 알아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가수로서의 타고난 재능, 그러니까 발성이나 춤 동작이 다른 멤버들에 비해 다소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 노력과 수고를 다른 사람들은 몰라줘도 나 자신은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그 청년의 모습에 저는 왈칵 울어버렸습니다. 청년이 혼자서 무수하게 흘렸을 땀과 눈물의 시간을 뒤로 하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국 울컥한 적이 있었는데요. <화양연화 온 스테이지> 콘서트에 참석하신 부모님을 찾아 인사를 하며 목이 메어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울컥해서 그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방으로 훅 들어가 버렸어요. 저는 이미 수만 명의 팬들 속에 둘러싸인 나의 작은 아이, 무대 위의 청년을 바라보는 관객석의 엄마가 되어있었던 거예요. 미나리님, 제가 얘기한 적 있던가요? 아들을 낳은 후부터 세상 모든 남자의 모습에서 제 아들을 만난다는 사실이요.
순식간에 또 한 번 엄마가 되었고 이내 조금 쓸쓸해졌습니다. 저는 월드컵 축구경기의 승리를 기뻐하기보다 필드 위의 선수들을 부러워하고, 저 멀리 닿기 힘들어 보이는 온갖 성취를 손에 쥐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예전의 저였다면 무대 위의 그 청년에 이입해서 영상을 봤을 겁니다. 세계 최고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기쁘고 벅찬 무대일까. 그렇게 주인공을 꿈꿨던 제가 이제는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의 엄마가 된 거예요. 화양연화 콘서트 무대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화양연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내 인생의 봄 같은 그 시절은 지나갔구나.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마침내 아름다운 선율로 도착한 <메리 크리>를 들을 때면 고요하고도 치열했던 보아의 어떤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속으로 끙끙 앓으며,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자신을 다독여온 시간이 흰 눈처럼 내려앉았을 그 여린 마음까지도.
그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일에도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게 되었지만. 마음이 저절로 향하는 곳에는 내가 동경하는 대상이 있고, 그의 노래와 삶의 궤적이 내가 가진 느슨한 선분을 오롯하게 비출 때가 좋았다. 가끔 퇴근길에 버스에 앉아 <메리 크리>를 듣는다. 이 노래를 듣는 기분이나 태도는 그때와 달라졌지만, 오늘 나는 어떻게 끝나야만 하는가, 그런 질문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오늘 지나온 시간을 떠올렸다. 그런 노래가 내 재생목록에 있다는 것이 좋았다. 어떤 답을 내리지 않아도 좋은 시간이었다.
- 서윤후, <동경> ㅣ <제법, 나를 닮은 첫 음악> 중에서
화양연화가 잘 어울리는 소녀 시절의 보아가 떠오르네요. 저의 재생목록에도 보아의 <메리 크리> 같은 역할을 하는 노래가 한 곡 있습니다. 십여 년 전, 회사원 꼬꼬마 시절에 한 프로젝트를 맡은 적 있는데요, 저는 그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멋지게 말아먹었습니다. 그날은 행사가 종료되고 거기에 쓰인 하드웨어가 철거되는 장면을 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던 저녁이었어요. 프로젝트가 끝났다는 홀가분함은커녕 내일부터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걱정만 가득했습니다. 그때 같이 앉아있던 선배가 노래 하나를 틀어주며 말했어요. "이 노래까지만 딱 듣고 집에 가자."
그 노래는 Mika가 부른 <Happy Ending>이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다다른 곳은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스럽고 즐거운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사는 무척 슬픈 내용이었지만, 저에게 이날의 노래는 <Happy Ending>이라는 제목과 차곡차곡 차오르는 멜로디로만 기억되어 있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나름 숙련된 모습으로 프로젝트를 해내고 있지만 행사의 마지막 날 회사로 가는 출근길에 저는 꼭 이 노래를 듣습니다. 첫 행사를 망치고 내내 울었던 꼬꼬마 회사원 하나를 달래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오늘도 괜찮을 거다.'라고 주문을 걸며 출근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처음 듣는 음악이야.
가령 카페에 앉아 일할 때. 텍스트를 읽거나 지겨울 때 낙서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어떤 음악이 들려올 때가 있어. 처음 듣는 음악. 그것은 흐르는 시간과 타성에 젖은 의식을 잠깐 동안 멈추게 하지. 움직이던 손가락과 눈꺼풀을 멈추게 해. 마치 뇌에 은하수를 붓는 느낌이야.
- 박연준, <불어오는 것들 -T에게> ㅣ <어떤 날 6 - Listening to the space 여행, 음악> 중에서
이 문장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당연하게도 아직 저에게 불어오지 않은 음악들이 무수히 많은 것처럼, 어쩌면 저의 화양연화도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봄 같은 시절은 지나갔을까. 그러면 나는 무슨 계절쯤 와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자꾸만 떠올리는 이유는 그저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봄처럼 살고 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벚꽃이 지고 난 후에 초록색 잎으로 커나가는 나무를 특히 좋아합니다. 그러니 저의 계절은 봄과 여름을 반복하는 것으로 정하겠어요.
화양연화는 바로 지금이거나, 어쩌면 (BTS의 노래처럼) Yet to Come.
현재 뮈르달의 컬렉션 서가에 누워있는 책들은요,
강윤정 외, <어떤 날 6 - Listening to the space 여행, 음악>
- 12명의 작가가 여행과 이어진 음악 이야기를 각자의 문장으로 풀어낸 모음집.
구리하라 유이치로 외,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음악에서 소설 쓰는 법을 배웠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작품 속 모든 노래들.
권민경 외, <제법, 나를 닮은 첫 음악>
- 작가들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음악 이야기, 그리고 그 시절 우리의 모습.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 음원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플레이리스트 문화를 통한 요즘의 음악 경험.
도쿄다반사, <음악을 틀면, 이곳은 - 도쿄의 감각을 만드는 공간과 음악 브랜딩>
- 책에 실린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도쿄의 거리 곳곳을 걷는 듯한 방구석 도쿄 여행.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
- 음악이 공간과 사물로 존재할 가능성은? 도구를 통한 음악의 재발견.
신경아, <세상의 끝에서 만난 음악 - 사하라, 발칸, 아나톨리아 음악기행>
- 작가가 직접 만나고 온 낯설고 아름다운 음악, 그 속의 인생 이야기.
앨런 러스브리저, <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 - 아마추어, 쇼팽에 도전하다>
- 바쁜 직장인(가디언 편집국장)이 쇼팽의 걸작을 완주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피아노 연습 일기.
이진석, <살면서 꼭 한번 아이슬란드>
- 작가가 왜 세 번이나 아이슬란드에 방문했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음악 여행책.
이찬혁, <물 만난 물고기>
- 악뮤가 만드는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들, 그것을 구성하는 세계관이 담긴 소설.
황우창, <나는 걸었고, 음악이 남았네 - 세상의 끝에서 만난 내 인생의 노래들>
- 음악방송 작가의 인생 노래 12곡과 함께 차곡차곡 걸어 온 세계여행 이야기
히사이시 조, <히사이시 조의 음악일기>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그의 세상을 담은 음악 에세이
덧) 미나리님, 마지막으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알려줄게요. 진 청년이 부른 <The Astronaut>는 우리가 무척 콜드플레이가 함께 만든 노래였어요. 무려 크리스 마틴이 코러스를 넣었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렸던 콜드플레이의 콘서트에서 진 청년이 이 노래로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요, 얼마나 감동적인지.. 우리 다음에 만나면 그 영상을 함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