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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리 Mar 01. 2023

애주가의 고백

2022 뮈르달 겨울 컬렉션 - 술 

슬님께,


슬님의 따뜻하고 추억서린 편지를 받고 당장이라도 답장을 써야지 마음 먹었던게 무색하게 한 계절이 속절없이 가버렸네요. 늘 마감에 쫓기던 일에서 멀어지자 마음이 느긋해진 탓인지 겨울의 시작과 함께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인지 책상에 자리잡고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것이 저에게 쉽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이 겨울의 끝을 잡고 2월의 마지막날 편지를 띄워요.


뮈르달 컬렉션의 겨울 테마를 정해달라고 슬님이 요청했을 때 오래 생각지 않고 사심을 가득담아 '술'이라는 주제를 정했습니다. 겨울이라는 계절과 너무 잘 맞는 주제일 뿐 아니라 - 물론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그와 어울리는 술이 있겠지만요 - 20년을 꽉 채운 우리의 역사에서 술은 뺄래야 뺄 수가 없으니까요. 술은 우리가 겪는 많은 감정의 진폭을 극대화 하는 장치인 것 같습니다. 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함께 나눴던 많은 날들이 조금은 밋밋하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봅니다.


슬님과 학교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자소서를 쓰던 노트북으로 음악을 듣던 밤은 나의 20대, 그리고 슬님과 나를 특별한 무엇으로 만들어 주는 추억입니다. 그밤 함께 들었던 음악이 무엇인지 저는 분명히 기억을 합니다. 학교앞 감자탕집에서 청춘의 고민과 함께 쓴 소주를 마셨던 그 밤엔 비가 왔었던가요? 어느 가을 부산국제영화제를 맞아 부산에 간 우리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값싼 와인을 마셔댔지요. 그날 우리가 쓰고 있던 모자가 아직도 생생히 그려집니다. 슬님이 혼자 떠났던 미얀마 여행. 여행배낭에 미얀마비어를 넣어와 그걸 마시며 여행을 곱씹었던 밤도 기억하나요? 학교 음악감상실이 문을 닫던 그날 왁자지껄 마셨던 술도 잊을 수 없지요. 이렇게 쓰자면 이 한 바닥을 쓰고도 남을만큼의 추억들이 있네요. 술이었는지 젊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참 즐거웠군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묘한 연대감이 있는것 같습니다. 술을 모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어서일까요. 그래서인지 애주가인 저는 술을 소재로 한 글과 책에 쉽게 마음을 뺏깁니다. 제목만 봐도 술마시고 웃었거나 술마시고 울었거나 술마시고 실수했던 누군가의 과거를 더듬는 이야기가 있을것 같아 집어들게 되거든요. 뮈르달 겨울 컬렉션의 책들도 술집, 주조, 여행, 음식, 시와 음악 등 다양하게 가 닿아있지만 그 시작은 '술'이라 골라봤습니다. 


• 술딴 <개와 술>

• 김혜경 <아무튼 술집>

•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살고 술은 약해요>

• 탁재형 <일은 핑계고 술마시러 왔는데요?>

• 하라다 히카 <낮술>

• 이창협 <이과장의 퇴근주>

• 박용재 <재즈를 마시며 와인을 듣다>

• 남원상 <우리가 사랑하는 쓰고도 단 술, 소주>

• 미깡 <나라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

• 매거진F <위스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저는 이제 알쓰가 되어버렸습니다. 호탕하게 술을 마시던 미나리는 이제 없습니다. 어느새 맥주 한 두캔에도 다음날을 걱정하게 되고 술자리가 있으면 꼭 숙취해소제를 먼저 챙기는 나이가 되었네요. 그렇지만 오직 '취하는 것' 에만 목표를 두고 마시던 20대의 음주를 넘어 술과 이야기, 술과 음악, 술과 사람을 탐미하게 된 지금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나에겐 충분히 그것을 즐길 밤시간이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이렇게 쓰다보니 슬님과 뮈르달 컬렉션에서 책을 골라읽고 술을 한잔 하면서 책에 대해 우리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책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우리의 청춘과 그 시절의 부끄럽고 웃기고 슬픈 이야기들로 밤새 이어지겠죠. 그렇게 또 우리는 술에 대한 추억을 하나 더 쌓을 수 있겠고요. 


술과 우리의 20대에 대해 쓰다보니 어느새 2월을 지나 3월에 도착해있네요. 그래도 이 글의 시작은 2월 마지막 날이었으니 미션을 해냈다고 우겨보는걸로 하고 새 봄엔 우리가 좀 더 자주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길 바래봅니다. 


미나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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