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뮈르달 가을 컬렉션 - 사진
미나리님에게,
아이와 자려고 누우면 어김없이 고민상담소의 문이 열립니다. 아이의 고민을 들어주는 시간인가 생각하실 수 있지만 실은 저의 고민을 털어놓고 아이가 해결책을 알려주며 고민을 풀어나가는 잠자리 하이라이트 코너입니다. 매일 밤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하는 아이에게 어느 날엔가 사람들이 서점 뮈르달에서 책을 사가지 않는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지요. 아마도 그날은 빵권데이였나봅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책이 너무 적은 게 아닐까?"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책이 적은 것이 오히려 우리의 컨셉이라고 반발(?)하려다가 꾹 참았어요. 혹시 또 다른 해결책은 없냐고 되물었지요. 그랬더니 책을 추천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날에 인스타에다가 책 추천 포스팅을 하나 올렸는데 그 다음날 그걸 보고 왔다며 그 책을 딱 찾아서 사가는 손님이 있었어요. 그렇구나, 책 추천을 열심히 해야겠구나!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번 주의 책 추천을 잠시 미루고 미나리님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책을 파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비가 그치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이 일기예보는 이제 가을이 다 끝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뮈르달의 가을 컬렉션에 대해 편지를 부치는 것은 이번 주말에 꼭 해야 하는 일이지요.
'여행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서점이지만 그 외에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굳이 '뮈르달 컬렉션'이라는 코너를 마련했어요. 여행과 닿아있지만 딱히 여행 이야기는 아닌 그런 키워드를 붙잡고 그 계절, 한 철을 보내고 싶었죠. 그리고 저는 그 컬렉션을 미나리님과 함께 운영해보고 싶었습니다. 저의 제안에 미나리님은 '작고 이상한 성취'를 해보고 싶다며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회사에서 크고 대단한 성취만 추구했던 우리에게 이제는 조금 다른 모양의 성취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저도 동의해요.
뮈르달 컬렉션에서 우리는 어떤 성취를 할 수 있을까. 컬렉션으로 소개된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퍽 기분 좋은 성취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을 컬렉션의 책들 중 재입고를 여러 번 한 책도 있지만 대체로 엄청난 인기를 끌지는 못했어요. 좋아요. 이로서 미나리님이 희망한 성취의 수식어 '작고 이상한'에 부합하는 요소가 하나 만들어진 것 같아서 저는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책들이 팔려야 뭔가를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철마다 컬렉션을 만들어나가고 그 기록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인다는 것에 우리의 보람을 찾아보아요. 아,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존재감은 없었지만 하나하나 보석 같이 쌓인 가을 컬렉션의 책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제프 다이어, <인간과 사진>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
제프 다이어, <지속의 순간들>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 더 가까이>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과거의 문턱(사진에 관한 에세이)>
롤랑 바르트, <소소한 사건들>
김모아, 허남훈, <Conte De Printemps 꽁트 드 쁘렝땅>
김모아, 허남훈, <Conte D'Hiver 꽁트 디베흐>
김모아, 허남훈, <À Mouchamps 아 무샹>
하시시박, 봉태규, <마이크로스코프 2호 (FULL MOON AURORA)>
다카하시 아유무, <러브 앤 프리>
지미 리아오, <인생이라는 이름의 영화관>
허태연, <하쿠다 사진관>
지미 친, <거기, 그곳에 세상 끝에 다녀오다>
월간사진 편집부, <월간 사진(2022.9)>
그렇습니다. 가을에 첫걸음을 시작한 서점 뮈르달의 첫 번째 컬렉션 주제는 '사진'이었어요. 실은 개업과 함께 선보이는 것이니 '시작'과 관련된 여러 키워드를 떠올렸는데요, 영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없었죠. 그러다가 우연인지 운명인지 개업 며칠 전 아는 언니와 사진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번뜩 '이거다!'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아마 이 키워드를 결정하는 데에는 저의 무의식 중에 미나리님과의 추억도 작용했을 거예요. 이 컬렉션을 함께 만들어나가기로 한 미나리님과의 시간이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살아온 시간의 절반 정도를 함께 했저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만난 시간 중의 또 절반 정도는 카메라를 들고 만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우리는 사진을 참 많이 찍었어요.
"그것은 한순간에 대한 묘사에 불과하지만, 사진의 지속적인 느낌은 무엇이 벌어져 왔고 뭔가가 막 벌어질 순간이라는 느낌을 포함해 얼어붙은 순간을 양방향으로 몇 초간 늘려 놓는다."
- 제프 다이어, <그러나 아름다운>
우리는 그 순간을 찍은 것이지만 이 순간을 포함한 앞과 뒤의 맥락, 그리고 그 시간의 감정까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어요. 우리가 찍은 사진 중 어딘가에는 다른 사람들이 유추할 수 있는 맥락도 있을 것이고, 또 어딘가에는 우리만 아는 미묘한 감정도 들어있겠죠. 그리운 순간들이에요. 미나리님이 취준생이었고 제가 출국을 앞두고 있었던,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가난하고 한가했던 그 놈팽이 클럽 시절에도 우리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잖아요. 어쩌다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사진관에 그 필름들을 사진관에 맡겨서 스캔했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저는 그 수백 장의 필름 스캔파일이 들어있는 외장하드를 잃어버렸어요. 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봉해서 어디 깊은 구석에 넣어둔 것인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요. 차라리 잘된 걸까요. 상실감보다 묘한 안도감이 드는 이유는 제가 아직까지도 싸이클럽 로그인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와 닿아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날 때 카메라를 꺼내 들지 않지요. 언제부터였을까요. 출산과 육아의 터널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피부가 푸석해지고 모발이 가늘어지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요.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는 우리의 모습은 자꾸만 숨기게 되고 생생한 푸르름이 가득한, 말 그대로 '아름답다'라고 여겨지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훨씬 더 많이 찍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게를 개업하면서 본의 아니게 사진에 찍힌 제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어요. 여간해서는 카메라를 잘 들이대지 않던 지인들도 커피 바 안에, 그리고 서가 앞에 서 있는 저희 부부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는지 사진을 참 많이 찍어줬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는데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났어요. 그때처럼 제가 깔깔 웃고 있더라고요.
언젠가 어느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 미나리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요. 우리 인생의 변화 곡선은 점점 ZERO로 수렴해갈 것 같다고,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지요. 저도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미나리님, 저는 이번에 사람들이 찍어준 사진들을 보면서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 사진들이 찍힌 순간의 앞에도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왔고, 이 순간의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변할 거예요. 이제는 아이들의 성장만 찍지 말고, 우리의 성장도 사진으로든 글로든 기록해두고 싶어요. 그 성장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서로 응원할 수 있을 테니 새삼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이만 장을 보러 가야겠어요. 실은 노트북을 어깨에 이고 이마트에 왔고 지금까지 이마트 1층 스타벅스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블루투스 키보드가 있다면 저의 어깨가 좀 더 가벼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곧 저의 생일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고요.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빗방울처럼 어디론가 굴러가고 싶네요.
구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