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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l 30. 2023

여행자의 시간

우리들의 봄방학


지난 3월, 매일 가게에 들러 스페셜티 원두커피를 잔뜩 마시고 원두도 사가고, 다음날 또 오고, 그 다음날 또 오던 외국인 손님들이 있었다. 소노캄 고양에 외국인 숙박객들이 많구나 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스피드 스케이팅 캐나다 국가대표 선수들이었다.(무려 올림픽 메달리스트!)


알고보니 무척 전문적인 커피애호가들이었고, 그렇게 매일같이 신나게 커피 얘기를 나누면서 정이 들었다. 한국에 와 이렇게 숙소 앞에서 좋은 커피를 매일같이 마실 수 있을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다던 그들은 고맙게도 초보 바리스타인 남편의 커피를 아주 맛있게 마셨다. 그리고 카페비크에서 파는 원두와 커피에 대해 좀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스티브 뒤부아는 특히 커피를 많이 좋아해서 하루에 두 번 찾은 적도 있을만큼 그 기간동안 우리 가게의 애정어린 대표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그는 항상 원정 경기를 갈 때마다 원두를 챙기고, 드리퍼와 서버 등등 커피 내려마실 준비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이번 한국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는 들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카페비크를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말하며 진심으로 남편의 커피를 즐겼다.



스티브 뒤부아가 찍어 준 남편 (카페비크 사장님)
마지막 날, 카페 휴일에 그들을 초대하여 커피를 대접한 날


캐나다로 출국 하는 날에도 그들은 우리 가게를 찾아주었다. 경기 일정이 어찌될지 모르니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이미 여러 번 헤어지는 인사를 했었지만, 그날은 정말로 진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갓 볶은 원두를 챙겨주며 꽤 오래도록 마지막이 될 커피 한잔을 대접했다. 이번에 받은 응원과 격려 덕분에 미래의 카페비크 사장님이 지금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꼭 다시한번 찾아달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빈 가게에 남편과 앉았다. 삐익 문을 열고 "Hi!"외국인 손님들이 올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를 헛헛한 마음을 안고 이리저리 괜히 행주만 훔치고 있는데 같은 마음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왠지 여행이 끝난 것 같아.”


정말 그랬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것은 그들인데 마치 우리가 여행을 마친 것 같았다. 왜 여행한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단순히 영어를 많이 써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들이 다녀간 일주일 남짓한 기간동안 이상하게도 별 걱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깔깔거릴 수 있을만큼의 재미난 에피소드도 매일 있었다. 복직을 앞두고 스멀스멀 피어나던 고민들도 그 기간동안은 신기하게 잊혔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적당히 푹 잘 수 있었다. 일상이었지만 일상에서 살짝 비껴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자주 찾아오지 않는, 귀한 여행자의 시간이었다.



그 후 우리는 실제로 긴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네 식구가 약 3주간 뉴질랜드 남섬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아, 내가 이제까지 한 여행 중 단연 최고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만큼 놀랍고 신나고 풍부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나 지금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며 펑펑 울었던 날도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때 일주일 정도 연차를 내어 다녀온 여행의 시간과 아예 달랐다. 여행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인, 그야말로 “떠나왔다”는 기분이 여행 내내 가득했다. 가족과 친구 외에 아무런 업무 연락도 없었다. 제법 긴 여행이라 그 끝이 오지 않을듯 일상으로 돌아간 이후의 고민도 멀게 느껴졌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들과 이곳 낯선 땅에서 그냥 지금을 살면 되는 것 뿐이었다. 게다가 매일 내일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때 그곳에서 여행의 시간을 접어두고 이제 여기 뚜벅뚜벅 복직한지 두 달이 되었다. 내일 마주할 숙제들이 자꾸 떠올라 잠에 쉬이 들지 못하고 계속 불안한 내 모습을 보며 ‘아, 복직했구나’ 실감한다. 너무 행복하다며 펑펑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불안을 감추느라 더 차분하고 차가운 모습이 된다. 역시 회사 생활은, 해로운 것이다.


이런 나의 일상에도 반짝 ‘여행자의 시간’이 찾아 올 것이다. 부디 내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길. 꽉 잡아 내 안에 접어두길. 그렇게 내가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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