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Nov 19. 2023

어둡지만 빛나는 겨울밤을 기다리며

<자기만의 빛>, 미셸 오바마


미나리님에게


새까맣게 탄 미나리님의 얼굴도 이미 보았고,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귀중한 발견에 대해서도 이미 육성으로 들었습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에 제 마음이 새로이 울렁이네요. 엽서에 쓰여있는 것처럼 미나리님이 ”먼저 도착하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이 엽서를 받게“ 되었지만 늦지 않았고 잘 찾아왔다고, 곱게 붙어 있는 우표를 쓱 만져봅니다. 부지런히 날아온 엽서가 기특하네요.


“South Korea (Air Mail)"


미나리님의 글씨로 또박또박 박혀있는 이 한 줄은 우리 청년기의 여러 여행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순식간에 빠이 뒷골목을 서성이다가 루앙프라방의 축축한 시장 길바닥에 서있기도 하지요. 프라하에서 달콤한 립을 뜯어먹다가도 이내 시카고의 찬 비바람 속에 앉아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점점 중년에 접어들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 두 발을 내려다보게 되지요.



저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가을을 보냈습니다. 찬바람이 불어 이제 겨울의 문지방을 넘어서게 된 지금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정도예요. 그런 가을날에도 굳이 다행스러운 일을 꼽아보자면 출근길 저의 백팩에는 늘 미셸 오바마의 <자기만의 빛> 책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미나리님이 추천해 준 책이지요. 이미 숨이 차올라 넘어질 것 같은데 지금 이렇게 지치면 어떡하냐 내년이 본게임이라고 말하는 팀장 앞에서, 믿고 기댈 수 있는 동료 하나 없이 혼자서 큰 사무실에 앉아 야근을 할 때에도, 눈물 뚝뚝 흘리며 이 책을 집어 들었어요.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였던 그가 내내 품었던 고민들이, 지금도 답을 찾고 있는 여러 질문들이 결코 나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 책이 똑같이 눈물 뚝뚝 흘리며 저를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가을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동시에 저도 이 책을 비로소 덮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함께 해준 참으로 고마운 동료였어요.


“애들은 잘하고 있어.”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곤 했다.
그저 인생을 배우는 과정일 뿐이야.”
어머니의 말은 나 또한 잘하고 있으니 진정하고 나 자신의 판단을 믿으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것은 언제나 어머니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친정엄마에게는 내가 이렇게 울면서 회사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가까이 사는 시엄마에게는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날들이 있지요. 애들이 아픈데 휴일에 출근해야 해서 온갖 죄책감과 속상함이 눈물로 터져 나오던 그날에는 제가 전화기를 붙들고 말도 못 하게 울어서 시엄마도 같이 울며 아이들 곁으로, 우리의 곁으로 달려와주셨어요. 그날은 어머님도 똑같이 다 같은 감기에 걸려 힘드셨던 날인데 말이죠. 괜찮다, 괜찮다, 말씀하시면서 곁에 계셔주셨어요.



결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가을, 뮈르달의 가을 컬렉션은 없었어요.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계절이니, 12월이 오기 전에 겨울 컬렉션을 준비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쩜 좋아, 제가 요즘 너무 에너지가 없습니다.


소진되었어요.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간 프로젝트의 이후에는 늘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그 감정을 무척 경계하며 준비해 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이 일에 한 톨의 미련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공허함보다는 홀가분함이 훨씬 컸는데요. 지쳐버려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조용히 우두커니 누워있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다짐했어요. 저도 나에게 알맞은 선을 그어야겠다고.


궁극적으로 나는 나에게 알맞은 선을 그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변호사 일을 그만두었으며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는 직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적어도 이따금은 아이들의 무용 발표회나 소아과 진료가 있을 때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일하면 더 열심히,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법률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내가 그 법률 회사에서 얻은 조언, 특히 선배 여성들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백악관에 들어갈 때에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덕분에 어떤 싸움을 선택하고 어떤 자원을 관리할지 더 신중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패러다임을 바꾸려 들기 전에 먼저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야 하며 두 배 열심히 전문성을 단련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가르쳐주었다.


미셸처럼 저도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균형 있게 일하겠다는 복직 다짐이 와장창 실패로 돌아가 무참히 소진된 상태로 남게 된 지금, 저는 일에 대한 저의 알맞은 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너무나 반복적이라 전혀 새롭지 않은 과정이지만 이번에도 저의 고민을 함께 해주시겠어요? 곧 만나요, 우리-


미나리님에게 편지를 쓰다가 겨울 컬렉션의 키워드를 정했습니다. 미셸 오바마 <자기만의 빛>에서 따온 ‘빛’, ‘어둠의 시간을 밝히는 인생의 도구들’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들고 와볼게요.


어둡지만 빛나는 겨울밤을 기다리며,

겨울을 좋아하는 구슬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우연을 쫓아 떠나는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