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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Dec 24. 2023

울음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밤

2023년 뮈르달 겨울 컬렉션 - 빛


미나리님,


미나리님은 알고 계신가요? 저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하니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는데, 왜 소설은 잘 읽히지 않는지 스스로 참 의아해요. 오죽하면 저의 올 새해 목표가 '소설 읽기'였을 정도로 소설이라는 존재는 참 친해지고 싶으나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친구입니다. 허구의 이야기보다는 두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장면에 더 끌리나 보다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최근 저에게 다가온 소설은 백여 년의 시간을 거쳐 흘러내려오는 낯선 이야기였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이 책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나리님, 아시다시피 제 딸은 저를 참 많이 닮았잖아요.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표정도 닮아서 깜짝깜짝 놀라는 날이 하루이틀뿐만 아닙니다. 삐죽거리는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 표정에 다다르게 만든 그 아이의 심정을 (굉장히 큰 착각일 수 있으나) 제가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눈앞에 실재하는 존재인데도 마치 홀로그램 버추얼 휴먼을 보는 것처럼 그 뒤에 서 있는 다른 존재가 보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그 아이요.


어느 날에는 제 딸아이와 비슷한 눈썹을 하고서 작은 책상에 앉아 입술을 굳게 다문채 칠판을 노려보고 있는 한 아이가 나왔어요. 친구가 뒷면에 검정 매직을 잔뜩 칠한 크래커를 다정하게 먹여주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고맙게 받아먹다가 나중에 깔깔거리는 반 친구들의 말을 들은 직후였어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고, 왜 나에게 그런 걸 주었냐 큰 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지만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어버려요.


고개를 들어보니 왜 팀장 앞에서 나에게 그렇게 말했느냐 소리 지르는 회사 선배가 서 있어요. 그러는 선배는 왜 나에게 소리 지르냐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아주 작게 미안하다는 말만 겨우 할 수 있어요. 목소리를 더 높이면 이미 볼 한가득 찬 눈물이 더 차오를 것 같아서요. 눈 한번 깜빡이고 나니 작은 회의실에 앉아 있어요. 회의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업무 몇 가지를 두고 다들 못하겠다고 말하는데 저는 결국 못하겠다는 말을 똑같이 할 수 없었어요. 숨이 턱까지 찬 상태였지만 나눌 사람도 없이 그 업무들은 제 몫이 되었어요.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지는 않았어요. 퍽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료에게도 똑같은 말을 듣고 무방비 상태로 조용히 상처받는 중이었거든요. 눈썹만 씰룩거렸어요. 울지 않으려고.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 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고 눈이 뜨거워지지 않은 독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저 역시 여러 번 통곡을 했고 그때마다 놀란 아들 녀석이 달려와 저를 안아주었지요. 이 녀석도 커서 눈물 뚝뚝 흘리게 만드는 책을 만나겠지요. 그때 한 번쯤은 <밝은 밤> 읽다가 달랠 수 없을 정도로 꺽꺽 우는 이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감할 만큼 직접 경험해 본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푹 빠져서 할머니가 되었다가, 새비 아주머니가 되었다가, 증조모가 되었다가, 희자도 되고, 그러다가 끝내 어느 장면에서는 저도 만난 것 같아요. 딸아이의 단정한 눈썹 위에서 힘겹게 씰룩거리는 제 눈썹을 발견하는 것처럼요.


증조모와 희자가 보는 앞에서 새비 아주머니의 몸은 조금씩 달라졌다. 흉곽의 떨림이 사라졌고 목의 떨림도 사라졌다. 그리고 입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숨이 빠져나갔다. 증조모와 희자는 새비 아주머니의 몸을 안고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그대로 내버려뒀다. 시간은 새벽 다섯시였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순간에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에요. 서로가 있다면 그때야말로 터져나오는 울음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을거라는 말과 같은 말일겁니다. 상대의 성취를 내 일처럼 기뻐하는 일도, 함께 나란히 성장하는 일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들은 어두운 밝은 밤을 함께 걸어 나가는 존재가 되길 바라요. 사실 이미 그렇고요. 새벽 다섯시는 앞으로도 종종 당연히 우리에게 찾아올테고 저는 그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미나리님 곁에서 밝은 밤을 지킬게요.


미나리님,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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