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Jun 10. 2022

아이가 열이 날 때


첫째 아이는 기침이 심해 어린이집에 못 갔다. 둘째 아이는 열이 나더니 39도대를 돌파했다. 우리 부부는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둘 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어서 다행이지,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복잡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잘 놀고 잘 먹고 있다.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겠지만 아이에게 열이 나면 일단 너무 두렵다. 올해 6살이 된 우리 첫째 아들은 어릴 때부터 열이 잘 났다. 열이 났다 하면 40도를 찍었기 때문에 39도대 정도면(?)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내 마음의 안심과 효과적인 열 관리를 위하여 교차 복용 가능한 해열제를 늘 집에 넉넉히 두었다. 어느 한 계열의 해열제가 제대로 듣지 않으면 다른 계열의 해열제를 먹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안심을 주었다. 매번 처음 겪어보는 것 같은 이 상황들이, 고열로 인한 모든 합병증의 가능성이, 서툰 우리가 이 아이를 밤새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무척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


내가 자칫 잘못해서 아이를 더 아프게 할까 봐.


시어머니께서 열성 경련에 눈이 뒤집힌 아드님(훗날 나의 남편)을 품에 안고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일화를 들은 이후부터는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다. 아들이 열성 경련을 일으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자 수십 번 시뮬레이션 해보기도 했다.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것도 없이 119에 연락을 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열성경련 병력이 있으면 보통보다 경련을 일으킬 확률이 3-4배 높다고 들었다. 그래서 열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매번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아이는 우려했던 일을 겪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생후 16개월에 접어든 둘째 딸은 그간 가벼운 열감기 한두 번 정도 앓은 것 같다.(맙소사.. 한 번인지 두 번인지, 혹은 세 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두 달 전 코로나에 걸린 것으로 돌치레는 한 것 같은데,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열이 나기 시작했다. 해열제로 열이 잘 잡히긴 했지만 일단 병원에 데려갔다. 열이 나기 시작한 2일 차여서 아직 목에는 뭐가 보이지 않았는데 (오빠와 같은) 단순 목감기일 가능성 70%, 요즘 슬슬 나오고 있는 수족구 또는 구내염일 가능성 15%, 돌발진 10%, 코로나 재감염 5%로 보인다고 한다. 이틀 후에 다시 오면 정확히 진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글방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글방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언니가 말했다. "오늘 만난 60 어르신이 40대에게 집에 어린애 있어서 좋겠다 하시더이다." 그렇다. 그리워질 것이다. 불덩이 같은 작은 아이를 바로  옆에 눕혀놓고 돌볼  있는  밤이, 해열제로 쉽게 진정시킬  있는 몸의 감기가, 힘든 밤을 보내도 그럭저럭 버티는 나의 젊음이 그리워질 것이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아이는 홀홀 독립해 아픈 날에도  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날에는 약도 소용없이 시간만이 치료해줄 마음의 감기를 속수무책 앓게 될지도 모르,  시간이 흐른 후에는 내가 오히려 아이로부터 돌봄을 받게  수도 있다.


약국에서 받아온 약을 먹이고 작은 아이 옆에 누웠다. 아이의 목을 만져본다. 내 손가락 하나만 쏙 들어간다. 뜨끈한 열감은 가시고 아이의 식은땀이 느껴진다. 열이 내리려나 생각하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땀이 많이 난다. 그 순간 정신이 확 들며 벌떡 일어났다.


해열제를 너무 많이 먹인 것이다.


아까 약사가 지어준 약봉투에는 항생제와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해열제가 가루약으로 들어있었고, 필요시 교차 복용을 위한 덱시부프로펜 계열의 물약이 추가로 들어있었다. 그런데 내가 별생각 없이 그 가루약과 물약을 모두 먹인 것이었다. 체온계에 35.1도 숫자가 떴다. 열이 내리려나 싶었던 식은땀은 저체온증의 증상이었다. 119에 전화를 할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친구에게 카톡을 할까, 동동거렸다. 긍정왕 남편이 "한두 번 그럴 수 있다"라고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고, 열나요쌤(열나요 어플 만만세)의 해열제 과다복용 가이드를 검색해본 후에야 조금 안심했다.


아이의 체온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땀을 닦고 얇은 이불을 여며 잘 덮어두었다. 내 체온이 전달되도록 아이를 포옥 안았다. 왜 약을 잘못 먹였을까, 아들 해열제 먹이는 것에 익숙해져서 안일하게 생각했나, 내가 지금 너무 피로한 상태인가, 등등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잠 못 드는 밤이 길어질 것 같다. 아이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더니 내 몸에 짧은 팔을 두른다. 나를 안아주는걸까. 이내 잠든 아이의 말이 내 심장에 들렸다.


"엄마, 그냥 실수한 거야. 그럴 수 있어."






*커버사진 : 하이케 팔러, 발레리오 비달리, <100 인생 그림책> 중

매거진의 이전글 자책 회로가 가동된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