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맛은 무슨 맛?! 빨간 맛? 파란 맛?
[정해진 맛은 맛없어]
내가 꿈꿔왔던 내 인생은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꾸미고 싶은 대로 꾸미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획일화된 맛에 길들여져 내 길이 아닌 남들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고, 주변 모두 그게 바른 길이라 말했다.
첫 번째 사건은 중 3 때였다.
IMF를 직격타로 맞은 우리 집은 어린 내 눈에도 버거워 보였다. 어차피 재미도 없고, 잘하지도 않는 공부 그만하고 상고로 진학해 빨리 일을 배우고 돈 벌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이 내 발목을 잡았다. 가족들을 비롯해서 친한 친구들, 지인들 모두 '안된다.'라고 한 입으로 모아 말했다.
아니, 왜?!
나를 설득할만한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를 풀어보자면 사회가 바라보는 상고, 공고의 시선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사회가 말하는 정해진 '맛'에 이끌려 인문계 고등학교를 입학했다. 대학교도, 직장도 그 정해진 '맛'때문에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해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두 번째 사건은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주얼리를 본 업으로 바꾸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가고 싶은 학교를 정하고, 일본어 자격증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중, 이번에도 역시 주변에서 내 소식을 들은 모두가 나를 말렸다.
'그곳에서 학교도 다니면서 돈도 벌어야 한다고? 그게 가능하겠어?!', '그냥 여기서 회사 다니지 왜 가려고 하는 거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무모하다고 했다. 강단 있게 밀고 나갔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마음도 약하고, 경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자신은 없지만 경쟁터에 나가야 했기에 늘 불안했고, 눈에 불을 켜고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밀려 다니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 했고, 어느 순간 익숙해져 갔다.
[이런 다양한 맛이 있었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해외로 나왔다. 나올 때 역시 주변 사람들은 '멀쩡한 직장 놔두고 왜 맨 땅에 헤딩하냐.'며 말렸다. 몇 번 주저앉아버린 후회가 없었다면 나는 현실에 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세상에는 상상 너머의 다양한 '맛'이 존재하고 있었다. 벽돌 맛, 촛불 맛, 모래성 맛, 나뭇가지 즙 맛, 비누 상자 맛,,,
이민 후 첫 5년은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자리 잡힌 정해진 '맛'을 찾아다녔다. '그 맛은 이래서 안돼, 저 맛은 그래서 안돼.'라며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나갔다. 정말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병 속에 갇혀있다 나와 더 이상 높이 뛸 줄 모르는 벼룩처럼 스스로 정해진 '맛'에 기준을 정하고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덧, 5년이 넘어가면서 서서히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줄었다.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정해진 '맛'을 권하지 않았고 뷔페처럼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맛을 하나씩 용기 내어 맛보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처음은 불안했지만 하나씩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있었고, 걱정했던 것만큼 이상한 맛이 나는 것은 없었다.
[내 맛은 무슨 맛일까?]
며칠 전, 자유로운 일을 시작한 남편에게 "이제 당신이 원하던 대로 수염도 길러보고,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출근해 봐."라고 말하던 중 깨달았다. 그 누구보다
나도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패션도, 음식도, 일도, 꼭 정해진 '맛'대로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했다. 내일부터 당장 변할 수는 없지만 계속 의식해 가며 내 '맛'을 찾아가 볼까 한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 잘 모른다. 취미정도야 말할 수 있겠지만, "죽기 전에 이건 꼭 해봐야지 하는 버킷리스트가 뭐야?"라는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답게, 내 '맛'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샌가 버킷리스트도 생기고, 50대에 하고 싶은 일도 생기겠지. 그 맛이 빨간 맛일지, 파란 맛일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 하지 말고, 내 스타일대로 천천히 즐기며 가보자. 옆 길에 피어있는 꽃도 보고, 하늘의 구름이 흐르는 것도 구경하며 천천히 그렇게.
그러다 보면 인생의 결승선에 다다랐을 때 숨차지 않고, 너무 재미있는 '맛'을 봤다며 잘 놀았다. 싶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