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볼 줄 아는 것보다 본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내 발은 일명 ‘칼 발’이다. 엄지 발가락이 길어 매번 양말을 신고 내려다 보면 실로폰 모양의 발가락들이 키순서대로 정렬되어 있다. 덕분에 양말은 구멍이 나기 쉬워 싼 양말을 사서 버리면서 산지 오래 되었다. 특히나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산 고가의 압박스타킹이 카드 고지서가 날아오기도 전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때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발 모양이 지문만큼이나 세세하게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 나아가서 발 모양에 따라 걸음걸이도 사뭇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간혹 신발의 밑창이 앞쪽이 많이 닳았는지 바깥쪽이 많이 닳았는지만 봐도 저 사람의 발 모양을 대략 추측해볼 때도 있다. 발가락의 모양에 따라 몸의 무게 중심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데서 출발한 관찰적 경험들은 인물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할 때 그림의 디테일을 살리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단순히 인물의 외형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상을 상상하면서 그리게 되기 때문이다. 발가락의 모양만 설정해두어도 그 모양의 차이가 걸음걸이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그 사람의 전반적인 삶의 습관까지도 유추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다’는 것의 영향력은 인물 뿐 아니라 사물을 표현하는데도 큰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눈앞의 붉은 사과를 그린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둥근 구 형태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 특이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관찰력이 있는 사람은 그 사과의 형태 뿐만 아니라 표면의 미세한 주름까지 ‘본’다. 사과가 그다지 신선하지 않음을 눈치챈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그림은 어떻게 다를까.
형태만을 관찰한 사람은 완벽한 사과의 비례에 중점을 두고 그림을 그릴 테지만 주름을 통해 사과의 신선도를 가늠하게 된 사람의 그림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몇 개 더 ‘봤다’고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게 된 사실들을 내가 ‘어떻게’ 표현 할 것인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림은 디테일이 더 살아난다. 그는 다소 상해 쪼그라든 사과의 형태 뿐 아니라 저채도의 색을 사용하며 그려 낼 것 이며 사과의 작은 상흔에도 이야기를 덧입혀 그림을 그리는 내내 또 다른 상상을 통해 새로운 사과를 도출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손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사과나무에서 시작된 저 사과가 이런저런 사람 손에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인간의 삶과 연관시켜 감정이입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 그려진 그림은 그냥 ‘사과’ 그림이 아닌 ‘상한 사과’와 같이 사과에 자신만의 스토리가 더해져 보는 사람에게까지 전달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단순히 무엇을 ‘본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와 비례를 구분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같은 것을 봐도 그 이상의 사실들을 유추한다. 결국 관찰력이란, 보이는 것 너머의 추상적인 사실들까지도 그림을 통해 구체화 시키는 능력인 셈이다. 우리는 절대 같은 것을 볼 수가 없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까지 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많이 보는 것 보다 본 그것을 ‘어떻게’ 그림에 접목 시키는지가 중요하다.
물체가 명사라면 화가는 그 명사를 꾸며주는 ‘형용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형용사 중에 나만의 형용사를 찾는 법. 바로 모두가 매일 보는 하늘, 매일 보는 구름, 매일 보는 전봇대처럼 우리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과 사물들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