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비행기에서 유언 생각하기
"어떡하냐? 수요일에 제주에 강풍 분대!"
남편이 갑자기 속보를 들고 뛰어온다. 나 혼자 갑작스레 2박 3일 광주 친정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돌아오는 일정이 하필 '수요일'이다.
남편의 속보를 듣고, 인터넷을 검색하니 더 심난하다.
난 비행기가 무섭다.
신혼 초 먼저 미국으로 떠난 남편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혼자 올랐다. 기상이변으로 태평양 상공에서 비행기가 마구 흔들리고... 그러다 덥석 옆에 앉은 생면부지의 백인 남자 손을 잡고 말았다. (흠, 그때 그 백인 남자의 표정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하간 난 아직도 비행기가 무섭다. 근데 무슨 배짱으로 제주에 와서 산다 했을꼬...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법은 하나. 2박 3일 일정을 미친 듯 앞당겨 1박 2일로 치르고 화요일 밤, 강풍이 불기 전에 제주로 돌아오는 것!
당장 예약했던 수요일 비행기를 취소했다. 흑. 23,000원에 끊은 비행기표 환불 가격이 무려 16,100원.
생돈이 나갔지만 어쩔 수 없다. 혼자 덜컹거리는 비행기 안에서 정신줄 놓지 않고 있을 자신이 없으니...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 팔뚝을 손가락 부러지라 쥐어 잡고, 허옇게 뜬 얼굴로 숨도 못 쉬고 있을 테니까.
화요일. 부랴부랴 광주 일정을 마쳤다. 시간 날 때마다 제주공항 날씨와 바람의 속도와 방향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뭐, 벌써 가냐? 섭섭해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얼른 가방을 챙겨 들고 지하철을 탔다.
출발 예정시간은 밤 7시 20분 아시아나.
근데 띠링. 불길한 문자 오는 소리가 난다. 8시로 출발 지연이란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오늘 안에, 강풍이 불기 전에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 정도는 봐준다.
근데 출발은 또 늦어졌고, 난 겨우 8시 33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남편에게 톡을 보낸다.
비행기에 올라타니, 탑승객이 50명 정도! 헐, 설마 모두 강풍에 위험하다고 취소했나?
심장이 두근댄다, 나댄다, 벌떡댄다. 게다가 비행기 좌석 번호가 32? 뒷좌석은 흔들리면 놀이기구 수준인데... 또 겁이 잔뜩 난다. 토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승무원에게 물어본다.
"제가 비행기 공포증이 심한데, 혹시 좌석을 앞쪽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네. 편하신 좌석으로 옮겨 앉으세요."
다행이다. 앞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금세 비행기가 이륙을 한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차고 있는 시계의 심장박동이 128. 미친다. 운동할 때도 안 올라가는 심장 박동수다.
무섭다. 올라가자마자 착륙 준비를 한다고 방송을 한다. 뜨자마자 내린다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근데 착륙이... 참, 길다. 강풍에 비행기가 덜컹거리더니, 착륙을 못하고 빙빙 돈다.
오 마이 갓.
심장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손잡이를 손가락 뼈마디가 하얘지도록 붙잡는다. 난 얼른 이어폰을 끼고 딸내미가 보내준 음악을 튼다. 근데 노래 제목이...
'Rise'
'Sweet Chaos"
딸냄! 진정 이게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보낸 선곡이 맞다 말인가? 그래도 그것밖에 없으니까, 열심히 반복해 귓구멍에 음악을 쑤셔 넣어본다.
Push through hell and Rise! Rise! Rise!
지금 지옥을 헤치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갈 땐데... 노래는 자꾸 Rise를 외친다.
비행기는 착륙은 못하고 흔들리고, 그래서 난 남길 유언을 생각한다. 근데 생각나는 유언이라는 게....
흠.
'남편! 까뭉이를 부탁해!'다.
무슨 혼자 남게 될 남편이나 딸내미 걱정은 하나도 안 한다. 어차피 나 없이도 엄청 독립적으로 잘 살아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그냥... 불쌍한 우리 집 강아지 까뭉이만 걱정된다. 내가 없으면 까뭉이 생식은 누가 주문하고, 이빨은 누가 닦이나?
그래도 돌아보니 참, 인생을 잘 산 것 같다. 죽기 전에 유언이라는 게, 겨우 강아지 생식과 이빨 걱정이라니... 또 유언으로 남길 말이 없나 곰곰이 생각하는데...
꽈당.
어느새 비행기가 제주 땅바닥을 치고 착륙을 한다. 혼이 쪽 빠질 것처럼 몸을 빨아 당기더니 서서히 멈춘다.
아, 살았다.
안도의 숨을 쉬고 공항에 들어서니, 벌써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공항 바닥에 담요를 깔고 허물어져 있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못 탈까 봐 남편이 1시간 운전해 날 공항까지 데리러 왔다. 살아 돌아왔으니 남편 얼굴이 더 반갑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비바람에 강풍이 불고 차까지 흔들거린다.
"거봐. 내가 오늘밤에 제주 오길 잘했지?"
난 뿌듯해하며, 반갑게 까뭉을 맞는다.
밤새 바람이 미치게 분다. 달칵달칵 집의 어딘가가 뜯겨나가는지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그래도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잠을 설쳐도 좋았다.
다음날 오후, 서울 사시는 주인댁 부부가 짱하니 나타났다. (안채는 우리가 살고, 바깥채는 주인댁이 가끔 내려와 머문다.)
수요일이었다.
"비행기 안 흔들렸어요?"
"하나도 안 흔들렸는데... 오전에는 결항되고 난리였는데."
"... 몇 시 비행기였어요?"
아, 괜히 물어봤다.
"4시 30분."
헐.
내가 수요일에 오려다 무려 16,100원 생돈을 내고 취소했던 그 시간이다.
그러니까....
그냥 예정대로 수요일에 그 비행기를 타고 왔으면, 강풍도 없었고, 출발 지연도, 비행기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 씨.
그러니까.
괜히 강풍 온다 난리치고 고생만 했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인생, 암찌깨나 살아.
좋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길이 꼭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피했던 길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니.
남 피해 주는 일만 아니면,
너무 계산하지도 재지도 말고,
덜 겁내고.
덜 무서워하고.
조금은 용기 있게.
암찌깨나.
뜨자마자 금방 내리는 뱅기에서, 남편에게 집의 강아지 새끼, 부탁한다는 그런 황당한 유언 남길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지 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