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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Jul 04. 2023

그래, 산책 갔다 뭘 봤다고?

제주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

"남편! 내가 뭘 봤게?"


저녁나절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물었다. 난 혼자 우리 집 겁보쫄보 강아지 '까뭉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남편은 헬멧을 벗으며 잔뜩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뭘 봤는데?"


남편의 표정이 십분 이해가 되고 남는다. 까뭉이를 혼자 끌고 나갔다오면 꼭 뭔 일이 생겼으니까.


어느 겨울엔 까뭉이가 힘으로 날 끌어당기는 바람에 빙판길에 미끄러져, 똥강 손목이 골절돼 덜렁대고 들어왔고, 어느 날은 까뭉이 줄에 꼬여 시멘트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겨우 허리를 부여잡고 집에 기어들어왔다.


제주에 오니, 자유로운 영혼의 유기견도 심심찮게 등장해 우릴 놀라게 한다. 


게다가 도시에서 키우기 힘들어 끌고 내려왔는지, 4살도 아니고 4달 됐다는데 육중한 몸에 헉헉대는 숨소리도 무서운 셰퍼드가 입마개도 하지 않고, 주인을 질질 끌고 간다.


난 까뭉이 줄을 꼭 잡고 맘이 쫄리는데.


컹컹컹.


까뭉인 자기 5배는 되는 무서운 대형견을 보고 대책 없이 짖는다. 난 엄한 목소리로 까뭉이를 꾸짖는다.


"조용히 해! 너 대관절 뭘 믿고 그러니? 나도 너 못 지켜줘~."


난 9킬로 까뭉이를 질질 끌고 최대한 구석에 쭈그려져 있다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뭐야? 키우는 개의 크기와 품종에 따라 서열이 갈리는 이 이상한 기분은?


난 흥분된 목소리로 남편을 다시 재촉한다.


"얼른 맞춰봐! 내가 산책 갔다 뭐 봤는지?"

"뭐, 지네 봤어?"


지난주에 집에 들어온 지네를 겁도 없이 휴지로 잡았다 손가락 콱 물려 또 난리 피웠으니.


"아니야. 더 커."

"뱀? 꿔어엉?"

"아니. 더 크다니까."

남편의 얼굴에 살짝 짜증이 몰려온다.

"멧돼지 아니면 고래?"

"아니. 내가 뭘 봤냐면 말이야."

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 토해내며 말했다.

"말!"

"뭐, 말을 봤다고?"

남편의 말끝이 한껏 높아진다.

응. 맞아, 아빠! 엄마랑 나, 엄청 커다란 말 봤어.

맞다. 살다살다 난 산책길에 혼자 산책 중인(?) '말'을 봤다.


한적시골길 삼거리를 탁 도는데.


허걱.


거기에 고삐 풀린 말이,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갈기 휘날리며 흐느적 흐느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눈동자는 지진 난 듯 흔들렸고.


머...어...엉


까뭉인 그 자리에서 얼음 되어 멍 소리 한번 못 냈다. 난 반사적으로 까뭉이를 번쩍 안아 들고, 뒷걸음쳐 나무 뒤에 숨었다.


심장은 쿵쿵쿵 요동치는데.


갈색말은 유람이라도 하듯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다 우리 쪽으로 한번 휙 고개를 돌린다... 그 커다랗고 예쁜 눈망울을 뒤룩.


헉.


오지 마, 절대 이리는 오지 마.


설마 달그닥달그닥 말발굽 소리 내고 먼지 일으키며 뛰어와, 내 앞에서 앞발 높이 쳐들고 히이잉거리는 건 아니지?


난 까뭉이를 더 꽉 껴안는다. 다행히 말은 윗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난 안도의 숨을 내쉰다.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 카메라를 켰을 땐, 이미 말은 한참 눈에서 멀어진 뒤였다.   

저기 저기 말!

근데 산책길에 '말' 보면 어떡하나? 119에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유기마 보호소 뭐 그런 곳에 연락해야 하나? 뒷집에 퇴임한 119 대원에게 지나가는 길에 물어볼까? 별 생각을 다하고 걷는데, 쌔애앵 커다란 트럭 한 대가 우리 곁을 쏜살같이 지나간다. 혹시 말 주인?


고삐 풀린 그 말은 한동안 자유로운 시간을 누렸으려나... 말 주인이 그 말을 조금은 늦게 찾았기를 바래본다.


제주 사니 산책 나가 별 것을 다 만난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뱀도 보고, 시끄럽게 날아오르는 덩치가 산만한 꿩도 보고, 바닷가에 고래도 보고. 


이젠 말까지 봤으니 또 뭘 보려나...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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