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딸냄! 우리 베르사유 궁전 가지 말고 공원에 피크닉 갈까?”
베르사유 궁전을 가기로 한 날 아침에 딸내미에게 물었다.
“너무 좋지.”
딸내미도 이제 구경 다니는 일에 지쳤는지, 선뜻 그러자 한다.
우리는 베르사유 궁전 관광 대신 뱅센 숲에 있는 플로랄 드 파리 공원으로 피크닉을 갔다.
숙소 소파에 깔려있던 담요를 배낭에 쑤셔 넣고, 마트에 들러 샌드위치와 음료수, 과일과 샐러드로 배낭을 불룩하게 채우고, 지하철을 종점까지 타고 공원에 도착했다.
볼 것 많은 파리까지 와서 베르사유 궁전 관광을 포기하고 공원에 피크닉을 간다면, 누군가는 그 비효율적인 결정에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과 스페인,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넘어 프랑스에서 여행 32일 차를 맞고 있는 우리에게는 관광의 욕망보다, 아무 일정 없이 빈둥거리며 느긋하게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게 뭐예요?”
“뮤지엄 패스!”
공원 매표소를 지키던 덥수룩한 머리의 청년에게 69유로에 구입한 뮤지엄 패스를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물건처럼 앞뒤를 돌려보며 신기하게 들여다본다. 우리가 지금 파리 관광객의 지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다.
아름드리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나무숲에 들어오니 마음이 편하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덕분이겠지만, 오랜 세월 한 자리에 서서 바람도 햇볕도 비도 눈도 꿋꿋이 맞으며 살아가는 나무가 우리에게 위안을 건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무 그늘 아래 담요를 깔고 먹거리를 늘어놓고 배를 먼저 채운다. 그러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다.
오늘의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길을 잃을까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고, 소매치기당할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기차 시간에 늦을까 봐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딸내미와 마음의 간격 채우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누군가가 기대하는 내’가 아니어도,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음악이 흐른다. 주위의 나무가 들썩거리며 춤을 추더니, 호수의 오리도 춤을 추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남녀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백발의 노신사도 흔들거리며 박자를 맞춘다. 공원이 흥에 싸인다.
연한 갈색 머리에 옅은 보라 민소매와 칠부 타이즈를 입은 다섯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음악에 맞춰 나풀나풀 춤을 춘다. 윗옷을 한껏 옆으로 치마처럼 펼쳐 잡고, 빙빙 돌며 엄마의 손을 이끌며 리듬을 탄다. 그 모습이 귀여워 공연장의 연주보다 아이의 춤에 마음을 뺏긴다. 여자아이는 파란 샌들까지 옆에 벗어던져놓고 본격적으로 스텝을 밟는다. 삶에도 저마다의 타이밍이 있고, 그때마다 서로 다른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것을 마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눈만 굴리며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으른 엄마에 비해 딸내미는 몸으로 체험하는 놀이가 더 흥미롭다. 빨간 채양으로 둘러쳐진 네 바퀴 탈 것을 빌려 공원 구석구석을 탐험한다.
선명한 파란색 목덜미를 자랑스럽게 흔들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꼬리 긴 공작새도 만났다. 연꽃이 한두 개 피어나기 시작하는 호숫가에서 펼쳐진 동물들의 오케스트라 연주도 귀 기울이며 듣는다. 파란 토끼가 플루트를 불고, 빨간 말이 첼로를 켠다. 흰색 청둥오리가 오보에를 연주하면, 그 옆에서 살구 색 너구리가 신나게 심벌즈를 쳐댄다.
“안돼. 안돼. 엄마 무서워. 천천히, 천처니이~~~”
“뭐? 이것이 무섭다고. 말도 안 돼.”
내리막길을 내달리면서 무섭다고 소리 지르는 겁쟁이 엄마를 놀리며, 딸내미는 페달을 더 부지런히 밟는다.
파리의 공원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푸르른 잔디에도 넓은 호수에도 금발의 피아니스트에게도, 유모차를 탄 아기에게도.
여행 마치기 3일을 남겨두고 십년지기 친구를 파리 숙소에서 맞았다. 친구는 프랑스 남부 와이너리 투어를 마치고, 와인 한 병을 등에 전리품처럼 꽂고 씩씩하게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프랑스를 혼자 여행하는 흥분과 즐거움 못지않게 긴장 또한 만만치 않았던지, 며칠 못 먹고 못 잔 사람처럼 얼굴이 핼쑥해져 있다. 매운 한국 라면을 급히 끓여 먹이고 한숨 자라 했더니, 다행스럽게 금방 기운을 차린다.
이제 우리 여행 멤버는 둘에서 셋이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함께 헤쳐 나갈 친구가 옆에 있다니 든든하다. 그런데 이 허전한 마음은 또 뭔가? 계속될 것만 같았던 딸내미와의 여행이 이제 끝나는구나, 설익은 사과 꼭지 억지로 비틀어 따듯, 매일 자고 나면 생기는 어설픈 용기를 박박 긁어모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던 여행도 이제 끝나는구나. 아쉬움에 맥이 탁 풀린다.
“딸내미는 한국 가는 게 좋아? 여행하는 게 좋아?”
오늘도 핸드폰에 코 박고 업무에 부산한 딸내미에게 물었다.
딸내미는 핸드폰에서 잠시 눈을 떼고, 허공에 눈동자를 뒤룩 한 번 굴려주더니 이렇게 내뱉는다.
“난 둘 다 좋은데. 여행도 좋고 한국에 가는 것도 좋고.”
한국에 돌아가 다시 빡빡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그렇다고 긴장 속에서 여행을 계속하는 것도 싫은 나는 둘 다 좋은 딸내미가 부럽기만 하다. 여행이 끝나가니, 여행에서 얻은 기운으로 더 씩씩하게 잘 살아갈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음에 뚫린 구멍으로 불안이 휙휙 지나다닌다.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긴장하고 불안할 거야. 그럴 땐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청소부 베포 <모모>-
여행이 끝나고 마음에 바람이 지나가고 무슨 일이든 손에 안 잡히면, 내가 쓸어야 할 긴 길은 잠시 잊고,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하자.
한국에서 올려다본 하늘이 바로 뱅센 숲 플로랄 드 파리 공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숲에는 하늘을 덮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숨을 쉬고, 파란 토끼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작은 여자아이가 나풀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면 잠시 비질을 멈추고 쉬어도 괜찮을 게다.
아직은 파리의 아침이 세 번 더 남아있다.
파리의 하늘 아래 부스스 눈을 뜨고, 삐거덕거리는 창문을 겨우 열어 파리의 공기를 허파 가득 채워 마시고, 푸드덕 날아오르는 비둘기에게도, 마당에 줄지어 세워둔 열 대 남짓 자전거에도 눈길 한 번 쓰윽 주고, 진한 커피 향으로 오감을 깨우는 그런 아침이.
난 아직 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