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프랑스어 단어 하나가
나에게 오기까지

이건 마약 거래가 아닌데

by 글쓰는공여사

에펠탑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는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후드득 떨어뜨리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우산을 쓰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두리번거린다. ‘지하철에 내리자마자 바로 에펠탑이 보인다던데….’ 지나가는 우산과 우산 사이로 갑자기 에펠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파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식상하게도 에펠탑이다. 에펠탑을 실제 봤다고 착각을 일으킬 만큼 많은 사진과 그림을 봤으니, 별 감흥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에펠탑을 마주한 순간 첫눈에 반한 연인처럼, 에펠탑은 내 마음에 쏙 들어와 여행 내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으로 세워진 철골 건축물. 파리 한가운데 300미터 높이로 우뚝 서서, 어두워지면 정시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구조물.


런던에서는 빅벤 시계탑에 꽂히더니 파리에서는 에펠탑이다. 비가 주춤해지는 사이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셔터를 마구 누른다.

_8094404.JPG 내 우산 속 에펠탑

멋진 에펠탑을 눈앞에 두고도 딸내미는 때가 되니 어김없이 배가 고프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딸내미 레이다 망에, 임시 가판대의 누텔라 크레페가 걸린다.


바닥이 비칠 정도로 얇게 구워낸 반죽 위에, 사춘기 지랄도 잠재우는 악마의 잼, 초콜릿 누텔라를 듬뿍 펴 발랐다. 초콜릿의 진한 달달함이 축축한 공기에 실려 딸내미의 코와 혀의 미각을 한껏 자극했나 보다.


“엄마, 나 저거~ 우리 저거 사 먹자.”


딸내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누텔라 크레페를 파는 임시 가판대로 나를 이끈다.


가판대에는 두 명의 젊은 여성 판매원이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커다란 팬에 크레페 반죽을 연거푸 올리고 뒤집고, 누텔라를 바르느라 정신이 없다.


“One crepe, Please!”

크레페 하나를 주문하고 4유로를 내민다.


“감사합니다.”

금발의 여성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한국말에 놀란다. 유명한 관광지이고, 워낙 한국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국말을 배웠나 보다 뿌듯함에 미소를 보낸다.


딸내미의 크레페 반죽이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기름 냄새를 풍기며 익는다. 딸내미는 스페인에서부터 맛 본 누텔라 잼에 영혼이라도 팔 기세다. 지켜보는 딸내미의 오감은 고문을 당한다. 부드러운 누텔라 잼을 충분히 바르고, 들고 먹기 편하게 종이에 감싼다. 이제 우리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된다.


“Thank you!”

난 습관처럼 땡큐라 말하고 크레페를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금발의 여성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고 크레페를 내놓질 않는다.


“?!?!?!”

당황스럽다. 돈 계산도 마쳤고 땡큐 인사말도 했는데, 크레페를 건네받지 못한 나의 손은 여전히 텅 비어있다.

우리에게 뭔가를 더 원하고 있는데, 그게 뭐지? 예상지 못한 상황에 우리는 혼돈에 빠진다.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자. 우리는 슬기로운 종, 호모 사피엔스다. 5G의 속도로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의 파일을 순식간에 뒤져 도움될 만한 경험을 찾아본다.


그런데 돈 주고 땡큐 인사도 했는데, 물건을 건네주지 않는 상황은 갱단 영화에서 마약 거래할 때 밖에 없다. 물건은 안 건네주고 코트 자락에 숨겨온 긴 장총을 꺼내 다 죽인다.

워워워워~ 너무 멀리 갔다. 우리는 마약이 아니라, 4유로 크레페를 사는 중이다.


아! 알았다. 나는 몇 분 전에 우리에게 건넨 금발 여성이 뱉은 한국말 ‘감사합니다.’에서 힌트를 얻고 답을 도출해낸다. 우리에게 금발의 여성이 원하는 것은 프랑스어로 ‘고맙습니다.’는 말이다.


숙소 찾고, 길 찾고, 일정 짜느라 정작 스페인어, 이탈리어, 프랑스어로 인사 한마디를 찾아보지 않았다. ‘영어 안 통하는 데가 어디 있겠어?’ 몇 마디 의사소통할 줄 아는 영어실력만 믿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는 ‘고맙습니다.’가 프랑스어로 없다.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작은 가판대에서, 프랑스 금발 여성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크레페를 들고 한국인인 나의 입에서 단 하나의 단어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손을 내밀고 크레페를 받지 못한 시간은 아마 5초도 안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60대의 초고속 카메라가 우리를 촬영하고 있다. 하늘에서 느리게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가판대 천막 위를 또르르 또르르 구르고,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우리의 눈동자는 길을 잃는다.


크레페를 받으려고 내민 나의 빈 손은 꼼지락거리고, 단어를 뱉지 못해 어색한 입술은 움찍거린다. 하나의 단어를 찾아 뇌의 전두엽을 애절하게 훑고 또 훑느라 생긴 곤혹스러운 미간이 주름을 만들고, 우리 뒤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이는 다리가 흐려져 섞인다. 에펠탑의 불이 바안짝 바안짝 느리게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고, 결코 크레페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침묵의 순간에,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가판대 안으로 빨간 우선을 접으며 들어오는 넉넉한 외모의 중년 아주머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금방 눈치를 채고, 우리의 마비를 풀어줄 단 하나의 단어를 우리에게 건넨다.


“Merci.”

메르시


난 성급히 그 단어를 주어 올려 누텔라 크레페와 맞바꾼다. 이제야 만족스러운 금발의 판매원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크레페를 우리에게 넘긴다. 우와~ 크레페 한 번 먹기 힘들다.

_8094428.JPG 나에게 메르시를 발음하게 한 금발의 여성분이다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점차 줄어들어, 프랑스 사람들은 관광객이 영어로 물어보면 못 알아듣는 척하거나, 영어로 물어봐도 프랑스어로 답할 만큼 불어 사랑을 실천한다고 한다. 영어를 지금보다 더 잘하지 못하는 것만 마음에 두었던 나에게 가판대에서의 프랑스어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요즘도 프랑스 영화를 보거나 프랑스 관련 뉴스를 들으면, 그때 일이 생각나 나에게 힘들게 온 프랑스어 단어 하나를 가만히 소리 내어 읊조려본다.


“메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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