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화장품 가게를
덮친 메뚜기 떼 사이에서

잘 들여다보면 어딘가 달라져 있을 거야

by 글쓰는공여사

드디어 여행 끝내기 이틀 전이다. 가족과 지인들 선물에 대한 부담이 이탈리아부터 잔잔하게 일렁이더니, 마지막 여행지 파리에서는 격랑의 파도가 되어 나를 사정없이 때린다. 선물을 사야 해, 선물을. 한 달 넘게 여행하고 빈 손으로 돌아가서 ‘여행 참 재밌었어요.’라고 말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


파리를 더 보고 싶은 욕심은 이미 물 건너가고, 화장품 선물을 모두에게 돌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가족 외에는 선물을 하지 않겠다는 여행 초반의 단단한 생각은 다 부서지고, 눈에 밟히는 사람들 리스트는 꼬리를 물고 늘어만 간다.


그런데 나는 화장품은 잘 모른다.

대학 다니는 4년 내내 얼굴에 스킨과 로션만 바르고 다녔다. 대학 졸업식이라고 색조 화장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하고 갔더니, 친구들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무라듯 말했다.

“와우~ 왜 이제야 화장을 하고 온 거야?”


4년 내내 쳐다봤던 나의 맨얼굴이 아무래도 신통찮았나보다.


결혼식 날에는 진하게 화장을 해야 웨딩 사진 잘 나온다는 미용실 아가씨의 꾐에 빠져, 눈가는 파랗게 입술은 빨갛게 내 얼굴이 분칠 되는 걸 방관했다. 광주에서 신부 화장을 가장 잘한다는 미용실이었다. 완성된 내 얼굴에 내가 놀라, 결혼식 내내 마음 진정시키는 게 낯선 결혼식 절차 따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화장품과 나와의 거리는 그만큼 멀고도 멀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이 있다. 내가 화장품은 잘 몰라도 쇼핑 리스트는 찾아보면 다 나온다.

“꼬달리 에센스 3개, 유리아주 립밤 8개, 르네 휘테르 샴푸 4개 ….”

치밀한 계획은 다 세웠다. 이제 딸내미와 친구에게 몽쥬 약국으로의 진격을 명한다.

_8124841.JPG 파리 지하철 역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몽쥬 약국은, 녹색 십자 표시를 높이 달고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약국 앞 도로에는 사자 로고가 인상적인 푸조 자동차가 지나가고, 줄지어 늘어서 있는 자전거도 보인다. 분명 파리가 맞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따리 풀 새도 없이 숨 가쁘게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한국의 도떼기시장이다.


선반에는 립밤과 핸드크림, 영양크림과 클렌징 워터가 그득 쌓여있고, 손님과 직원이 한데 엉켜서 움직인다. 프랑스 직원이 구사하는 경상도도 전라도도 아닌 한국말 사투리가 선반 위를 씽씽 날아다니고, 손님들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느라, 화장품 담긴 철제 미니 바구니를 들고 수시로 몸을 비튼다.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린 한 무더기의 한국 관광객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이제는 쓰나미가 약국을 덮친다. 선반 위의 화장품들은 흉년의 메뚜기 떼가 곡식 훑고 지나가듯 순식간에 바구니에 쓸어 담기고, 선반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직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여기는 아직 낭만의 도시 파리이고, 난 아직은 딸내미와 함께 유럽여행 중인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나도 생존 욕구에 충실한 한 마리의 메뚜기가 되어 곡식을 찾아 헤맨다. 옆에서 쓸어 담는 메뚜기들을 보고 덩달아 마음이 부산하고 긴박하다. 내가 먹을 곡식이 한 톨도 안 남아 있을까 봐.


한 달 넘게 유럽을 여행하며 쌓아온 느릿함과 평온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나도 눈알을 부지런히 굴려 리스트에 있는 화장품을 찾고, 없으면 직원을 소리쳐 부른다.

1407876732157.jpeg 몽쥬 약국이다

리스트에 있는 화장품을 무사히 챙기고 계산을 끝냈다. 세금 감면 혜택도 받고, 샘플도 공짜로 받아 챙기고 약국을 나왔다. 문을 열고나오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SF 영화처럼 다시 파리의 거리다. 횡단보도를 느릿느릿 건너는 지팡이 짚은 할머니도 보이고, 배낭을 짊어지고 캐리어를 들들들 끌고 가는 지친 여행객도 보인다.


“엄마, 제대로 담아오기는 한 거야?”

정신없이 쇼핑을 끝내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제대로 사기는 했는지, 제대로 계산은 했는지, 받아야 할 샘플은 챙겼는지 의심의 꼬리를 숨기고 있던 차에 딸내미의 한 마디가 내 마음을 확 어지른다.


체면이고 뭐고 없다. 약국 앞에 서서 화장품을 담아온 비닐봉지 속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영수증과 확인 작업에 들어간다. 뭘 하나 비닐봉지에 안 담아줬다 해도 파리에 다시 올 수는 없으니까.


손해는 절대 사절인 좁쌀 같은 마음이 한 달 여행으로 조금은 부드러워진 줄 알았더니 다 똑같다. 제 몫을 챙기지 못할까 급급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 전전긍긍하고, 미래를 살고 과거를 살고, 현재는 없다.


숙소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 있으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래도 한 달도 넘은 여행인데 …. 잘 들여다보면 어딘가 달라진 내가 있을 거야. 일만 분의 일이라도 여행 전과 다른 내 모습이 어딘가 있겠지.’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화장품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꼬옥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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