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우리 딸
파리에서 구입한 화장품 한 보따리와 ‘무료로도 못 드린’ 먹거리를 캐리어에 다시 쑤셔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좁은 좌석에 몸을 꾸겨 넣고 이륙을 기다리며 숨을 몰아쉰다. ‘유럽여행’이라는 단어가 남편 입에서 튀어나온 그 순간, 비행기와 기차를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하던 그 시간들…. 난 나에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일들을 다시 끄집어내 펼쳐놓고 복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옆에 앉은 딸내미는 12시간 비행의 첫 영화를 선정하느라 눈과 손가락이 화면을 바삐 움직인다. ‘현재 진행형’ 딸내미는 시간만 나면 과거를 뒤적이는 엄마보다 그래서 항상 더 행복하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버스와 택시를 타고 36일 전에 떠난 그 자리에 부푼 캐리어를 끌고 돌아왔다. 아파트 앞에는 새벽마다 나의 힘든 하루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커다란 아름드리 벚나무도 그대로 있고, 지난여름 벼락 맞아 밑동만 남은 대추나무도 여전히 화단에 그대로 박혀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는 낯설다. 떠나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남편은 인천공항에도 버스터미널에도 일 때문에 마중 나오지 못했다. 아직은 잊지 않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왔다. 한아름 꽃다발과 환영카드가 남편 대신 우리를 맞는다.
“부인! 딸내미와 함께 한 여행도 좋았겠지만, 그 예쁜 추억을 가지고 앞으로의 시간도 더 예쁘게 보냅시다.”
카드에 적힌 글을 읽으니, 여행의 끝에 허탈해진 나의 마음에 살랑 따뜻한 바람이 한줄기 지나간다.
우리는 예약한 낯선 펜션에 처음 들어와 여기저기를 확인하는 손님처럼, 괜히 부엌도 둘러보고, 화장실 문도 열어보고, 베란다도 들여다본다.
딸내미는 자고 있던 고슴도치를 깨워 인사를 건네고, 아직도 기운이 남았던지 캐리어를 바닥에 풀어헤친다. 조금 있다 조용해서 들여다보니, 자기 침대에 누워 쌕쌕거리며 잠을 자고 있다. 이제야 여행의 피곤이 몰려드나 보다.
워낙 손이 가지 않았던 아이라, 딸내미를 키우면서 딸내미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이 자기 아이에 관한 새로운 고민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을 때마다, 내가 한마디라도 거들라 치면 이렇게 말했다.
“어휴~그 집 딸 얘기는 꺼내지도 마. 자기 집 딸 같은 애가 어디 있다고 비교를 해. 자기는 딸 거저 키우는 줄 알고 고마워해야 해.”
그래서 손이 안 가서, 혼자 내버려 둬도 잘 크려니 생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에 현관에서 손을 흔들며 딸내미를 학교에 보냈다. 입학식을 치른 지 3개월이 넘었고, 제법 익숙하게 빨간 가방 등에 메고 긴 머리 찰랑거리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딸내미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가 떴다. 보통 때는 스팸전화라 생각하고 받지 않았던 그 전화를 그날은 나도 모르게 받았다.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거기….”
낯선 중년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딸내미의 이름을 전화에 대고 정확하게 뱉었다.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쳤다. 딸내미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뭔가 잘못되었구나. 직감적으로 느꼈다.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인가요?”
내 목소리는 떨리고, 그 낯선 목소리가 내뱉을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제발, 제발…. 두려움이 몰려왔다.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집 앞 횡단보도에서요. 지금 병원 응급실로 가는 중이에요.”
자식의 사고를 알리는 전화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다. 그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겪어본 사람만 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흐르고 말은 앞뒤 없이 계속 꼬였다.
핸드폰에서는 아이는 괜찮으니 놀라지 말라고, 엄마 전화번호도 아이가 직접 말해주었다고 나를 안심시키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서둘러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차 옆자리에 앉아 꺼이꺼이 울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을 거다, 우리 딸내미 괜찮을 거다, 괜찮다고 했으니 가서 보자.”
딸내미가 많이 다쳤을까 봐, 딸내미를 잃게 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응급실에 들어가 보니 딸내미는 침대에 멀쩡하게 앉아있었다. 그 순간 내 다리가 확 풀리고 숨이 한꺼번에 몰아쉬어졌다. 조그마한 딸내미의 몸을 꼭 끌어안고, 여기저기를 살피며 외쳤다.
“괜찮아? 딸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신호를 위반하고 돌진하던 승용차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아이들을 덮친 사건이었다. 아침 등교 시간이었다.
딸내미보다 한 발 앞서 발을 내밀었던 남학생은 하늘로 붕 떠서 바닥을 치고 땅에 떨어졌다. 한 발 늦게 횡단보도에 발을 들여놓았던 딸내미는 몸을 차체에 부딪치고 돌면서 오른쪽 신발이 뒷바퀴에 끼었다.
브레이크를 얼마나 급하게 밟았던지, 도로에 스키드 마크가 몇 개월 동안 진하게 남아있었고, 소리는 또 어찌나 컸던지 도로 앞 상가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교통사고를 구경했다 한다.
사고를 목격한 아파트 주민 한 분이, 딸내미를 자기 차에 태우고 응급실에 가면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초등학교 아이들은 사고당한 아이들 다 죽었다고 학교 가서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담임 선생님 두 분이 헐레벌떡 응급실로 쫓아오셨다.(어린아이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딸내미를 살린 건 전날 산 새 운동화였다. 조금 넉넉하게 신으라고 사준 새 운동화 덕분에 발가락이 모두 차바퀴에 으스러질 뻔한 끔찍한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진료를 끝낸 딸내미를 지옥문을 박차고 나오듯 서둘러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며칠 후, 횡단보도 사고로 350만 원 벌금을 물어야 했던 사고 운전자가 선처를 구하는 전화를 나에게 했다. 난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매몰차게 말했다.
“아저씨! 지금 그 얘기가 입에서 나와요? 그냥 벌금 다 내세요. 벌금 내시고 앞으로 운전 조심하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도 분이 안 풀렸다.
그 날 내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사고 얘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했다. 가까운 국내의 친인척부터, 일본, 미국, 호주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말하고 또 말했다.
하다못해 택배 배달 온 바쁜 아저씨를 붙들고, 딸내미 교통사고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를 했다. 아마 마음씨 착한 그 아저씨는 그날 밤늦게까지 밀린 택배 배달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게다.
하지만 그렇게 쏟아놓지 않으면 내가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낯선 사람의 전화를 또 받게 될까, 딸내미가 내가 어쩌지도 못하는 운명에 다치게 될까 봐,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해보고 딸내미를 잃게 될까 봐 한동안 무섭고 또 무서웠다.
그 후로 7년이 흐르고, 여전히 일만 하느라 딸내미 어떻게 큰지도 모르는 철없는 엄마는 딸내미와 마음 거리 채운다고 벼락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고맙다, 딸냄. 철없는 엄마 옆에 이렇게 건강하게 있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