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라서 용서해준다
스위스 루체른을 떠나 7박 8일 일정으로 마지막 여행지, 프랑스 파리에 입성했다.
핫한 패션의 파리지앵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패션의 도시, 노천카페의 커피 향만큼 진한 포옹과 키스를 거리에 쏟아내는 낭만의 도시, 바로 그 파리에 우리가 와있다. 배불뚝이 캐리어를 질질 끌고.
지하철역에 들어서자마자 음악 소리가 들린다. 학교 관현악단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딸내미는, 소리를 쫓아 뒤뚱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저만치 앞서간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까지 현악기가 총동원되어 연주를 한다. 바로 코앞에서 생생한 연주를 듣고 있으니, 지금까지 여행하며 지나온 도시의 매력은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 파리가 좋다.
파리의 지하철역에는 어디에나 계단, 계단, 계단이다. 캐리어를 계단에 부딪쳐가며 겨우 역을 벗어나 숙소로 향한다. 에어비앤비 아파트 5층을 빌렸는데, 처음부터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예약을 미적거리는 나를 아파트 주인장은 이렇게 꼬드겼다.
“칠십 넘은 우리 엄마도 무릎 아프다 안 하고 잘 올라와요. 걱정 말아요.”
본 적도 없는 칠십 넘은 파리의 할머니와 오십도 안 되는 젊은 내가, 마음속에서는 어느새 계단 오르기 시합 중이다. 바로 예약 버튼을 눌렀다.
배불뚝이 캐리어를 옆에 끼고, 아파트 1층에 서서 5층 계단을 올려다보니 이런 상황을 정리하는 단어 하나가 딱 떠올랐다.
‘낚였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효율적인 5층 계단이 아니다. 돌고 도는 나선형에다, 각 층마다 펼쳐지는 계단참은 또 얼마나 넓던지…. 올라가다 배고프면 대여섯 명 둘러앉아 밥 해 먹고 기운 내서 다시 올라가도 되겠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런 숙소를….’
계단참을 지나갈 때마다 이런 후회를 다섯 번쯤 내뱉고 나니 드디어 도착을 하기는 한다. 숨은 죽을 듯 헐떡이고, 심장은 마구 뛰고, 땀은 온몸을 적시고, 팔다리 여기저기가 캐리어에 부딪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5층 아파트에는 숙소를 안내하려고 기다리던 금발머리 앤이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오는 우리를 빼꼼 내려다보더니 모른 척 다시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밉던지, 캐리어 그 자리에 던져버리고 단 숨에 뛰어올라가 금발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누른다. 나도 이제 여행 막판이야. 이것들아~
그러니까, 누가 캐리어에 바리바리 고추장이라 깻잎이랑 미니 밥솥이랑 싸가지고 오라고 했냐고?
정말 속상하다.
낯선 도시에 처음 도착하면 처음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그 도시의 첫인상을 만들고, 처음 만나는 숙소의 주인이 그 도시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도 지하철 계단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옮겨준 힘센 마르셀 때문에 마음이 푸근했는데, 파리에는 굽이굽이 돌고 도는 5층 계단과 빼꼼이 앤이 있을 뿐이다.
앤은 숙소의 여기저기를 대강 손가락으로 몇 번 찔러대더니, 5분도 안되어 Bye를 외치고 퇴장한다. 그래, 머리끄덩이 낚기기 전에 얼른 가라.
숙소를 찬찬히 살펴보니 사진발에 속은 것이 분명하다. 마룻바닥은 고르지 못해 걸을 때마다 삐걱거렸다. 후기에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던 소파 베드는, 그 사이에 120킬로그램 거인을 손님으로 받았는지 스프링이 나갔다. 뒤척일 때마다 끽끽 대며 침대가 소리를 질렀다.
분하다. 후기도 몽땅 다 읽어보고 결정한 건데….
후기와 실상이 이렇게 다른 이유를 여행 다녀와서 알았다. 숙소 주인장이 불편한 것은 빼고 후기를 올려 달라는 간곡한 메일을 나에게 보낸 것이다. 불평을 미리 차단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술에 씁쓸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가짜 후기를 정성스레 시간 내서 올려준 사람들은 뭐야? 파리의 댓글 알바야? 나는 아무래도 후기 쓰다 보면 성질에 못 이겨 영어로 욕만 잔뜩 써 놓을 것 같아서 아예 모른 척했다.
숙소의 계단과 시설은 아쉬웠지만 위치는 좋았다.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퐁피두 센터가 걸어서 10분 정도에 있었다. 산책 삼아 저녁 어스름 무렵 퐁피두 센터를 갔다.
오래된 거리에 뜬금없이 나타난 퐁피두 센터는 속내를 다 끄집어 보여주는 참 솔직한 건축물이다. 배수관과 가스관, 통풍구 등 건물 철골이 컬러풀한 색깔로 밖으로 드러나 있다. 건축의 파격이 엉뚱하고 신선하다.
1층에 위치한 서점에 들어가니 비로소 편안하다. 한 글자도 못 읽는 불어 책이지만, 익숙한 종이 냄새를 킁킁 맡고, 묵직한 책의 무게를 느끼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진다.
한참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던 딸내미가 불쑥 동물 그림이 그려진 그림책을 내민다.
“엄마, 나 이거 사고 싶어.”
그림책에는 귀여운 눈망울의 젖소가, 볼연지 깜찍한 앵무새가, 가시 삐쭉삐쭉 고슴도치가, 어떻게 동그라미에서 귀가 생기고, 눈이 생기고, 젖이 생기고, 날개가 돋는지 그림 그리는 순서가 실려 있었다.
책을 계산하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백발에 까만 테 안경의 노신사가 골똘히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말쑥한 흰색 와이셔츠에 카키색 반바지 차림이다. 패션 감각에 지적 취미까지 갖추기에는 노년의 시간이 참 취약한 인생 단계인데, 여기가 파리가 맞긴하나 보다. 나이에 상관없이 패션과 예술로 나를 물들일 수 있는 도시, 파리.
숙소 주인장이 사진발로 우리를 속였다 분해하고, 금발의 ‘빼꼼이 앤’이 우리를 곰살 맞게 대해주지 않았어도, 우리는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에 와 있다.
파리라서 이번 한 번만 모두 용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