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암을 진단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학생실습실에서 친구들과 족발을 먹고 있었다. 본과 3학년 때였는데, 이제 막 임상 실습을 시작했을 때라서 눈부시게 흰 가운 주머니에 새 청진기를 넣고 ‘거들먹거리며’병원을 활보할 때였다. 몇 걸음 걸으면 귀에서는 ‘하얀거탑’의 주제가가 환청처럼 울려 퍼지곤 했다. 그렇게 겉멋만 잔뜩 든 채 ‘의사 놀이’중이던 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의 엄마는 치료법이나 예후 같은,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보셨는데,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엄마는 뭐라고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고, 나는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모르는’ 동급생들에게 엄마의 질문을 다시 읊었다. 그러자 다들 족발 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다, 의대생의 오랜 습관이다.
자존심 상하게도 나는 ‘네이버’에 할머니의 병명을 검색했다. 지식검색에 웬 초등학생들이 이상한 답변을 달아 놓았다. 현대의학으로 암은 완치가 안 되니, 기도원에 오라는 답변도 있었다. 한숨을 쉬며 몇 가지 책을 뒤적였다. 예후가 좋지 않은 암이었다.
갑자기 깜짝 놀라게 되면,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는구나. 정말로 그렇구나. 나는 그게 무슨 비유인 줄 알았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언제나 건강했다. 직장에 다니던 엄마 대신 우리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며 학원에 데리고 다닌 것은 늘 할머니였다. 열 살 땐가, 열이 펄펄 끓는 나를 들쳐 업고 내 위에 솜이불을 덮어 꽁꽁 싸맨 채 비 오는 밤길을 한참 달려 응급실에 간 것은 나의 할머니다. 아빠와 ‘2인3각’달리기를 하던 운동회 날, 결승선에는 할머니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언제나 웃어주셨고, 늘 나를 응원해 주시던, 파이팅 넘치는 나의 응원단.
그런 할머니가 암환자가 되었다.
이후의 치료 과정은 지난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진단이 빨랐다. ‘우리 손녀가 여기 병원 의산데요….’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셔서 조금만 편찮으셔도 대학병원 진료를 보는 게 습관이 되셨던 덕이 아닐까, 하고 아직도 나 혼자 생각한다.
수술이 아무리 잘 되어도 암환자들은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게 되는데, 1년차 후반기에는 할머니께서 다니는 병원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가까이 오면 자주 볼 수 있겠지,’ 하고 들뜬 목소리로 좋아하시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그래서, 주말이면 자주 찾아뵙겠노라고, 진료 오실 때는 전화 주시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파견 후 6개월의 근무 기간 동안, 나는 할머니 댁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진료를 위해 병원에 와서 전화를 하셔도 뵈러 나가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업무량은 나를 조금씩 죽여 놓았다. 내 안에서 먼저 죽은 것들은 나의 인간적이고 약한 부분들이었다. 바빠요, 오늘은 안 돼요, 학회가 있어요. 지금 검사 중이에요. 나는 그런 뾰족한 말들로 할머니를 매번 찔렀다. 귀에서는 하얀거탑의 주제가 대신 ‘너는 바보야, 너는 멍청이야’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 했고, 학생 때는 빳빳하게 풀까지 먹여 입고 다니던 가운은 ‘걸레’와 ‘거적데기’ 사이의 무언가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시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습관 뿐이었다. 학생 때는 꽤 우수하다고 칭찬도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의사가 되어 병원에 나오니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련’이라는 이 힘든 달리기를 완주할 수 있을지 매일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파견 근무가 끝나던 주, 드디어 이 바쁜 병원에서 벗어난다는 생각과, 2년차가 된다는 설렘에 들떠 있던 나는 회진을 돌다가 작업치료실 앞에 멈춰 서 버렸다.
병원의 회진은 대부분 1년차 전공의가 ‘가이딩’을 하며 가장 앞에서 회진 일행을 이끈다. 휘적휘적 앞장서서 걷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전날 해당 환자에게 있었던 중요한 일과 오늘 아침의 검사 결과 등 몇 가지 핵심 사항을 교수님께 계속 말씀드리면서 회진 팀 전체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회진의 마지막 순서인 작업치료실 앞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가지고 계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오신 듯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중절모까지 쓰고 오셨다. 그러더니,
“세희야!”
“세희가 왔네!”
하고 소리쳐 내 이름을 부르셨다.
달리기 결승선에 서 계시던 운동회 날처럼, 두 분은 우리 과의 회진이 끝나는 장소를 물어물어 거기에 서 계셨던 것이다.
1년차 전공의인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잠시 동안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까스로 작업치료실에 들어가 교수님께 마지막 환자에 대해 보고하고 ‘저희 조부모님께서 오셔서….’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어서 가서 인사드리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 치료실 밖으로 나왔는데, 두 분 다 거기 안 계셨다. 전화를 드려 보니 벌써 병원 밖을 나가셨다며, 정말 얼굴만 보러 찾아왔다고 하셨다. ‘차라도 한잔 하고 가세요.’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 올랐지만 눈물이 나오기 시작해서 말을 제대로 못 했다.
나의 응원단이 언제든 결승선에서 나를 기다려 줄 거라는 것. 그러니까 몇 등으로 들어오든지간에, 결승선에 도착하기만 하면, 카메라를 들고 서서 내 이름을 연호해 줄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그 날 이후로 생겼다.
오늘 검사를 위해 나를 찾아 온 환자는 내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를 벗더니 검사실에 옷걸이가 없다며 짜증을 냈다.
짜증 이후에 이어지는 것은 신세 한탄이었다. 평생을 건강하게 살았는데, 어리고 예쁜 자신을 집안에서 억지 결혼을 시켜서 원하지 않는 출산을 하고 나서 인생이 망가지고 말았단다. 출산은 여자의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치질도 생기고 자꾸만 나빠져서 외과 수술을 받았다, 그러더니 암도 걸려서 자궁을 드러냈고, 그러고도 모자라 이상한 병에 걸려 이렇게 아픈 검사를 자꾸 받아야 한다. 아무튼간에 출산만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평생 건강하게 여행을 다니며 살았을 것인데, 출산을 해서 아무데도 못 가는 암환자가 되었다고 한참을 속상해하셨다. 그러더니 급기야 훌쩍이기 시작하셨다. 얼마 전에 동창들은 ‘그랜드 캐니언’을 갔는데 자기만 못 갔다, 동남아나 가자고 하는 촌스러운 애들을 설득해서 미국에 가기로 한 건 다 자기 덕인데 혼자만 못 갔다, 암 환자라서 못 갔다, 하면서 울기 시작하신 것이다. 보통은 이렇게 속상해 하시는 환자분들께는 몇 마디 틀에 박힌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오늘은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다.
“저희 할머니도 암 환자셨는데요, 얼마 전에 진단받은 지5년이 지나셨어요. 지금은 정정하세요.”
“…….”
“얼마 전에 해외 여행도 다녀 오셨어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신세 한탄을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빨리 검사 받고 치료 받으셔야 다시 여행도 다니고 하시죠.”
그리고 그녀는 그 후로는 검사하는 내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님, 출산은 몇 번 하신 거예요?”
검사가 끝날 때쯤 갑자기 궁금해져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한번.”
말을 하고, 그녀는 혼자 박장대소했다. 한참 신세한탄을 했는데 출산을 한 명밖에 안 했다는 걸 들켜서 민망하셨던 걸까? 갑자기 밝아진 그녀의 모습에 나도 함께 신나게 웃었다. 웃으면서, 오늘 일정 끝나면 우리 할머니께 전화 한 번 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검사가 모두 끝나고 그녀는 웃는 얼굴로 검사실을 나갔다. 검사실 밖에는 아마도 그녀의 외동아들인 듯 보이는 보호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잽싸게 그녀의 팔짱을 껴 부축을 했다.
그녀가 그녀의 응원단과 함께 무사히 결승선에 도달하게 해 달라고,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