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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예지 Apr 15. 2023

회복은 자잘 자잘한 일상을 기록하는 일에서부터

한길사X테라로사 콜라보 노트 Song of books 연보라(BK-13)

지난여름은 유독 힘들었다. '앓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초여름을 전후로 끝 간 데 없는 무기력에 발목이 잡혔다. 하루하루 밥을 차려 먹는 일마저 고역스러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수업을 신청했다. 오프라인 강좌였고, 매주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면서 강남으로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수업이 끝난 것은 8월 말 무렵이었다. 수업을 계기로 드라마틱하게 '무기력'을 벗어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그냥, 그저 나란 인간은 무언가를 '쓰는 상태'에서 안정감과 보람을 느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을 뿐.


첫 수업을 마친 날,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휴가 첫날은 파주 지지향에서 북스테이를 했다. 지인을 통해 지지향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잔뜩 기대감을 안고 파주로 향했다. 나 역시 지지향의 서가를 가득 메운 엄청난 책들에 압도당했다. 남편과 함께 서가를 빼곡하게 메운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운명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최정례 시인의 시집을 만났다. 앉은자리에서 시집 1장을 전부 읽었고, 그 시집을 반드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집의 제목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지지향을 다녀온 후 시집을 산 것은 8월 말이었지만, 그 시집의 나머지 부분을 읽기 시작한 건 9월이었다.  

 

"무엇이 할퀴고 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나는 시집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문장을 손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줄기차게 썼던 일기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과, 노트에 무언가를 쓰는 일마저 게을리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쓰기를 위해 한글과 워드를 번갈아 사용하며 때로는 블로그와 이따금 브런치, 아주 자주 SNS까지 즐겼지만, 무언가를 오롯이 손의 감각만으로 기록한 적이 언제인지 헤아려 보니.... 까마득했다.


어디를 가게 되든, 노트 한 권씩은 채집하듯 사 오길 좋아하는 내가, 정작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를 게을리 한 셈이었다. 책장을 뒤졌다. 길어 올린 문장을 기록할 만한 적절한 노트를 구하고 싶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노트 한 권을 집어 들었다. 2021년 여름 출판사 한길사와 커피 전문점 테라로사가 콜라보해서 만든 노트로, Song of books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연보라색 무지 노트였다. 오랜만에 파주로 나간 날, 한길사가 운영하는 한길 북하우스에서 이 노트를 구매했다.


최정례 시인의 시집을 완독 했지만, 노트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 건 10월 중순의 일이었다.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무기력은 걸핏하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계획한 무언가를 한없이 유보시키고, 성실하게 해 놓은 일들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그런 날들에 직면할 때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글쓰기와 관련한 작업을 할 때 쇼팽이든, 빌 에반스든, 지브리 ost든, 음악을 무한정 틀어놓고 있길 좋아하는 나는, 삶에 윤활유인 '노래'마저 음소거한 채로 지냈다. 그런 측면에서 Song of books 노트는 적합했다. 무지 노트였으므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쓰거나 그릴 수 있었다. 최정례 시집에서 만난 문장과 그림을 맨 먼저 기록하며, 노트와 인연을 맺었다. 깊은 해저에 산다는 지진 암시어종인 산갈치를 그렸고, 그 옆에 이런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산갈치를 읽은 날은 조금 더 울었다. 실은 최 시인의 시집을 읽는 내내 울었던 것 같지만. @류예지


"나는 기다란 것에 불합리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기다란 밧줄, 기다란 머리카락, 기다란 철로길 그리고 오늘 이십 미터가 넘는 산갈치. 그런데 슬플 것도 없는 이것들이 뭔가 그렇게 슬픈가."


좌. 그날은 연보라색에 꽂힌 날이었다. 우. 그러니 연보라색 노트와의 만남은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류예지


그러다 노트를 샀던 '그날'을 떠올렸다. 미지의 세계로 가고 있는 두 남녀가, 한정된 자원 속에서 수없이 계획을 세워야 했던 날들이었다. 당시 결혼을 준비 중이나와 남편은 제대로 된 수기 노트 하나 없이 노트북만 덜렁 켜둔 채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의견이 엇나기도, 조금 다투기도 했으리라.


해가 저물 무렵, 멀리까지 나왔으니 그가 좀 걷자고 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열기가 가라앉은 헤이리 마을로 드물게 감미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떤 이끌림에 의해 한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인줄 알았는데 그곳은 한길사 북하우스였다. 1976년에 세워졌으니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출판사, 한길사가 출간한 도서들로 가득 메워져 있던 1층을 지나 2층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책을 구경했다. 비스듬히 누운 계단을 따라 도열한 책들 중에서,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았고, 덜렁 이 노트 하나만을 들어 계산대 앞에 섰다.


그때, 우리에겐 책이 아닌

노트가 필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던 것도 같다. 연보라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패키징도 뜯지 않은 채 방치했던 노트는 1년 만에 쓸모를 찾았다. 그렇게 지난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이윽고 봄까지,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를 이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주로는 투두 리스트 정도이고, 그때그때 경험한 일들에서 비롯되는 생각들을 짧게 작성한다. 강박성을 버린, 조금 느슨히 풀어헤쳐진 긴 머리처럼, 해저 아래를 느릿느릿 유영하고 있을 산갈치처럼.


얼마 전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을 보며 다음의 문장을 기록했다. 틸다 스윈턴이 연기한 서사학자 알리테아의 말을 인용해 본다.


"이야기들을 보며 감정을 찾죠."


절반 넘게 쓴 연보라색 Song of books의 노트의 기록을 이따금씩 훑으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토록 빠져나오려고 했던 '무기력', 그 무기력에서 조금은 빠져나온 게 아닌가 하고. 그러니까 나를 심해와 같은 무기력에서 이끌어낸 건, 애써 들여다보기 두려웠던 감정을 하나씩, 하나씩 기록한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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