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맬 초콜릿을 내놔!
부산 영도구 영선동 오후 4시 45분
S야.
해운대도 광안리도 아닌 영도의 작은 흰여울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선 너와 나는 뷰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어. 우리 둘 다 그곳에서 보낼 시간이 매우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을 알았나 봐. 매해 여름마다 다리를 다치는 S야. 영문도 모르게 고장이 나는 발목 때문에 너는 답답해했어. 며칠 휴식을 취하면 낫겠지, 하고 대충 보내버린 시간에 복수라도 하듯이 다친 다리는 한두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지. 불편한 거동 때문에 네가 마음까지 다치는 날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럼에도 약속에 나와준 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어.
“주문은 1층에서 하래. 넌 있어. 내가 내려가서 할게.”
너에게 마시고 싶은 것은 카톡으로 이야기하라고 말했어. 취약한 발목만큼이나 너는 먹는 것에도 취약한 부분이 많잖아. 카페인이 들어간 무언가를 마시기만 해도 끓어오르는 주전자가 되잖니. 알코올은 말할 것도 없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1층으로 내려가 메뉴판을 보고 정말로 당황스러웠어. 메뉴판에 커피밖에 없었고, 그나마 차 종류 몇 가지가 있었지만 ONLY HOT이라고 쓰여 있었던 터라 이 무더운 여름날에 (심지어 더위에도 약한) 네가 마실 수 있는 메뉴는 없어 보였지. 계속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끝에 [글뤼바인]이라는 알 수 없는 메뉴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 생각했어. 노모에게 산딸기를 구해다 주는 심정이 이런 건가… 이 메뉴는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것 같은데 S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좋으련만. 쓸데없이 떨리는 심정으로 카페 주인에게 물었지.
“글뤼바인이… 뭔가요?”
“와인을 끓인 뱅쇼예요.”
나는 어떻게 이렇게 웃기면서 동시에 절망스러울 수 있는지 생각하며 메뉴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냈어.
[글뤼바인은 뱅쇼래ㅠㅜㅋㅋ]
너도 비슷하게 웃겨하면서 그냥 따뜻한 차 메뉴를 주문하겠다고 했지. 나는 따뜻하게 우려낸 차에 얼음만 넣으면 시원한 차가 될 텐데 왜 그것을 팔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주인만의 철학이 있겠지 짐작하며 따뜻한 캐모마일을 주문했어.
S야, 난 한참 전부터 조만간 반드시 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냥 너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토록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오롯이 너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한 것이 그날이었어.
너는 내가 위태로워 보일 때면 네 상담사에게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내 상담까지 대신 받는 사람이잖아, 짐작키로는 그때마다 상담사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셨을 것 같아. 상담사는 ‘그게 그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하고 너무 당연한 정답 같은 말을 한다고 했지. 너는 종종 참지 못하고 내게 ‘사실은 네 얘기를 조금 했다’면서, ‘상담사는 그게 네가 사는 방식이라더라, 흐흐흐…’ 하면서 멋쩍은 고백들을 늘어놓아. 나는 그런 너를 보면서 그만큼이나 나에 대해 골똘하고 걱정스레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동해. 유난히 네가 보내는 동정은 기분 나쁜 법이 없었다.
너도 나도 각자 엉망인 삶을 살고 있었잖아. 그저 너는 부산에서, 나는 서울에서 라는 점 말고는 다를 바 없이, 땀내 나는 여름을 보내고 있었지. 버티고 있었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어. 지난한 일상에 발목 잡힌 사람들 특유의 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 명이 마주 보고 있자니 찬란한 창밖의 바다 풍광이 아까울 정도로 쿰쿰한 공기가 주변에 흐르는 것 같았어.
네가 먼저 근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그간 네게 발생했던 사건만을 건조하게 나열하다가 ‘근데 나… 사실 힘들다’하는 말을 써내자마자 너는 왈칵 눈물을 쏟았어. 우는 널 보면서 <사실>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어. <사실>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은 대개 사람을 우는 얼굴로 만드는 것 같아. 사실이라는 단어 뒤에 이어지는 말이 힘겨운 고백인 경우가 많기 때문일까. 참고 참다가 어렵사리 겨우 한 글자 뗀 말이기 때문일까. 사실이라는 말은 네 마음속에서 얼마나 오래간 혼자이다가 겨우 세상에 나오게 된 걸까.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그 말을 삼켰니?
너는 너를 절망케 한 것들에 대해 말했어. 약점을 너무 후벼 판 나머지 깜짝 놀라버린 일들에 대해서. 그중 하나로 최근에 누군가 취업준비를 하는 너를 두고 한 말을 털어놓았지.
나는 ‘너를 몰라서 경솔하게 한 이야기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사람들은 뭐냐,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 말을 한 사람 정말 재수 없다…’ 등등 가능한 반박과 비난은 총동원했던 것 같아. 그저 내가 쉴 새 없이 내뱉는 반문들에 네가 안도감을 느끼길 바랐어. 근래에 그 말 말고도 무수한 말들이 너를 쪼그라들게 했을 것 같았거든. 내가 언제든, 어떤 말이든, 그 말이 왜 틀려먹었는지 n가지 이상의 이유를 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 또한 ‘사실은 말야. 난 정말 그랬다’ 하는 말들을 꺼내자마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 그 와중에 역시 사실이란 말은 사람을 울게 만드는군, 생각도 했지. 너는 그런 나를 꼭 안아주었고, 너의 포옹을 받고 나서야 나는 다른 상념들을 버리고 온전히 내 눈물을 가엾게 여기면서 울 수 있었어.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서 자세한 내막은 설명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 끔찍하게 잔인할 때도 있다는 건 덤으로 깨달았다고 말했지. 괜한 상처는 그만 받고 싶다고도 했고. 그 말을 듣고 난 너는 네가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말했어.
“그만 상처 받겠다는 건 더는 기대하지도 않겠다는 거잖아... 네가 오죽하면...”
사실 이 말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는데, 이렇게나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눈치채 준 사람은 없었거든. 미처 몰랐지만 사실 그런 말을 몹시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사실 너 기대하기를 그만두는 거구나, 네가 오죽하면 그랬겠어, 하는 말들. 취약함을 있는 대로 마주하고 위로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넌 알지,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지? 하는 말도 반복해서 말했고, 너는 부지런히 알지, 그럼 알지, 하고 대답해주었지.
음료를 시킬 때 각각 초콜릿이 하나씩 같이 나왔잖아. 과자가 함께 씹히는, 캐러멜이 들어간 초콜릿이었어. 우리는 한참 서로에게 상처 준 것들을 씹어주다가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쯤 그 초콜릿을 까먹었어. 입에 넣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는 단 맛. 미봉책 일지 언정 그런 효과 빠른 특효약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연신 “씨 이런 초콜릿 같은 걸 내놓으라고! 이런 게 필요해! 캐러멜 초콜릿을 내놔!” 하고 낄낄대다가 카페를 나와 바다를 구경했고 그러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지.
S야.
그날 시간을 보내고 부산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어쩌면 모든 일들이 너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하루 종일 네가 정성스레 쓰다듬어 주고 돌봐준 덕분에 나는 아주 조그마한 존재가 된 것 같았어. 덩달아 내가 겪는 어떤 일들도 아주 아주 작게 쪼그라들었지. 네가 보내주는 편애가 있다면 배짱을 조금 가져봐도 괜찮지 않을까. 뒷배가 있다고들 말하잖아, 그런 거.
하나 더 고백하자면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엄청나게 또 울었어. 미처 정리되지 못한 너절한 마음들을 추스르면서 말이야. 그런데 문득 창가에 비친 우는 나를 봤는데 우는 것도 예쁘길래 그냥 울음을 그쳤어. 네가 옆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미쳤냐고 했을까? 예쁜 거 맞다고 맞장구 쳐줬을까? 웃겨했을까? 맞장구치면서 웃겨했을 것 같아. 울음을 그치고는 씩씩한 마음으로 서울로 올라갔네.
너는 종종 내가 어디에서 그런 초인적인 사랑과 에너지를 뿜어내냐고 묻잖아. 끝도 없이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외치는 나를 조금 웃겨하잖니. 너는 그런 나를 가끔 염려하는 것 같지만 네가 날 이렇게 돌봐주는 이상 나는 계속 이렇게 울다가도 울음을 그치고, 끝없이 사랑을 말하는 사람일 것 같아. 네 덕에 오늘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눌 힘을 갖고, 그 힘으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살아가.
일 년 전 같은 날짜에 우리는 제주도에 있었어. 그때 참 좋았는데. 조만간 또 가자. 그때에는 다른 사람 말고 오직 너에게만 사랑을 쏟아낼게. 네가 무서워하는 내 무한대의 사랑을 주마.
좋은 연휴 마무리해, 우리 곧 만나자.
2019년 8월, 유림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