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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만 Mar 25. 2022

달라진 '동물학대' 대응, 이게 끝이 아니어야 합니다

[혜민의 참깨와 함께 ⑭] 경찰의 동물학대 신고 코드 신설, 의미와 과제

올해 3월, 나는 '범죄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서른셋,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맞을까. 대학원 면접 볼 때, 교수님들 앞에서 합격만 하면 뭐든 해낼 것처럼 말했던 나는 없어졌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입학 전, 범죄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헤맸고 그러다가 '범인'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분의 브런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곤 큰 위로를 받았다. 이 문장 덕분에 말이다. 


이상하리만치 범죄학을 공부하는 동료들 중에는 범죄의 피해 경험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어온 경우가 많았다. '왜'라고 하는 질문에 답은 '이래서'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당당히 내세우기 어려운 이유였고, 여전히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누구보다 개인적인 이유는 감정적으로 보일까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미니스트가 '범죄학 전공자'가 된 이유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페미니스트인 나는 평소의 일상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피해 경험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곁에 함께 하고, 피해 경험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부담 지워지지 않도록, 국가의 책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당 활동을 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나의 피해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고, 나라는 사람을 지켜줄 국가라는 공권력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다. 


"범죄로 인식하지 않았던 여성폭력의 현실이 이제야 범죄로 여겨지고 있어요."



올 초에 참여했던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에서 들었던 한 선생님의 말이다. 내가 범죄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건 범죄만큼 사회적으로 가변적인 게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범죄로 인정받지 못하던 수많은 행위가 이제는 범죄로 인정받는다. 또한 동시에 과거에는 범죄였던 게 지금은 아니기도 한다. 이런 범죄의 성질은 한편 범죄 행위에만 집중해 존재하는 사람들을 가리기도 하고, 피해자라는 한정된 자리에 가두기도 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범죄'라고 하면 텔레비전에서나 등장할, 저 멀리에 일어난 큰 일처럼 인식하곤 한다. 사실 그렇지가 않은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그 일에 처했을 때, 당황스러움과 어려움을 혼자 감당해내야하는 것처럼 여기곤 한다. 대표적으로 내가 그랬다. 


그래서 나는 '범죄학이라는 학문에 공권력이라는 국가의 책임의 언어가 소수자의 관점으로 담겨야 한다'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내게 소수자의 관점은 반드시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힘이 약한,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우리 반려묘 참깨도 주인공이다. 


참깨 ⓒ 조혜민



 

지난 2021년부터 경찰은 동물학대 신고 '코드'를 마련했다. 식별코드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경찰관이 범죄 내용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코드가 신설되기 전에는 동물이 사람을 공격했을 때에만 위험동물 출현 코드가 부여되었다. 즉 사람이 동물을 가해하는 범죄에 대한 코드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물학대 신고 코드가 마련된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경찰의 대응력이 보다 높아질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사례들이 모아지면 추후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면밀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동물학대 범죄를 대응하는 것에 있어 지자체와 경찰의 미흡한 공조체계, 전문가의 풀 부족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숙제들 역시 산적해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동물학대 신고 코드 신설이라는 진전이 있을 수 있던 것은 피해 동물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던 동물권 단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범죄라고 인식되지 않았던 과거에서부터 이것이 학대이자 폭력임을 알려왔고, 이러한 동물학대는 동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혐오범죄의 시작으로 이어짐을 수차례 경고하면서 말이다. 



피해가 피해만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바뀌어 다행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의 언어일까. 결코 피해자의 언어는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건 제도적 변화는 피해가 발생한 그 이후에 뒤늦게 따라왔다는 현실, 그 자체이다. 


사회적으로 피해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또는 은폐되기까지 했던 범죄를 드러내기 위해 국가는 여전히 무엇이 피해를 만드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사회구조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현상 그 자체로만 인식하고, 범죄의 복잡한 서사와 맥락을 단순화해 엄벌주의만을 강력히 외치며 그 안에서 국가의 제한된 역할만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을 방치해둔 채 말이다. 


나는 피해를 겪은 이후에도 단지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오롯이 살아가고 싶다. 또한 국가에 사후 구제만의 역할 뿐만 아니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하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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