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민의 참깨와 함께 ⑮] 이준석 대표의 음모론이 의도한 것
최근 한 오디오 콘텐츠의 패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에선 서로의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부르는 게 원칙이었고, 나는 어떤 별명을 할지 고민하다가 내 반려묘, '참깨'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평범한 시민뿐만 아니라 길고양이의 일상도 담아내어 말해보고 싶다는 큰 야망을 담은 별명이었다.
사실 여성단체 활동가로 지낼 당시 내가 사용한 별명은 '헤만'이었다. '조혜민'이라는 이름의 변형된 꼴이기도 하였고, 10대 때부터 친구들이 부른 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에서 성을 제외한 이름인 동시에 내가 선택한 이름이라는 의미가 컸기에 마음에 들었다. 또한 일적으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독립적인 존재로서 만난다는 느낌도 들었다.
별명을 사용한다는 건 상대방의 배경이 궁금하지 않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나이가 몇 살인지, 그래서 어떤 호칭을 덧붙여야 하는지 등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고, 그 덕분에 나는 여성단체 활동을 하며 만난 대부분 사람들의 나이를 몰랐지만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평범한 일이지만 다시 돌아보면 덧붙여지는 호칭에 의해 이름 자체가 사라지거나 나아가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잃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이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나는 '엄마들'이 떠올랐다. 직장에 다니다가 자녀를 돌봐야 하는 상황과 부담으로 일을 그만두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보단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사람들. 누구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그들의 진짜 이름은 대부분 모르거나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2년 전, 친한 언니의 결혼식 사회를 맡았던 날, 나는 식장에서 제공해준 '결혼식 사회자 원고'를 보며 몇 개의 단어를 추가하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양가 어머니의 성함을 넣는 것이었다.
결혼식 식순에서 보통 가장 먼저 이뤄지는 절차는 화촉 점화다. 이 순서에서 양가 어머니들은 입장한 후, 촛불에 불을 붙이며 식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사회자는 이 순서에 맞춰 "OOO 신랑 어머님과 OOO 신부 어머님, 입장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나는 당시 내게 주어졌던 사회자라는 권한을 맘껏 이용하고 싶은 마음에, OOO 어머님이라는 말과 성함을 함께 말했다. "OOO 신랑 어머님인 OOO님, OOO 신부 어머님인 OOO님, 입장하시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사실 하객들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너무나도 작은 변화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양가 어머니들의 '본래 이름'을 되찾아드리고 싶었다.
고집 부리지 않으면 나의 이름을 쉽게 놓칠 수 있다는 자각은 내가 나로서 표현되지 않는 세상 때문이었다. 나는 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당시, 연애를 했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진 않았는데, 그건 내가 누군가의 애인으로 소개되는 과정이 항상 유쾌하지 않아서다.
내가 가진 정치적인 의견, 생각, 가치관보다 내가 만난 상대방의 의중이 보다 크게 평가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은 비단 정치 활동을 한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닐 것이다.
▲ 정의당 배복주 부대표가 3월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표단 회의에서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공개 비판하고 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장애인 이동권 시위 방식을 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 저격" 글을 잇달아 올리면서 논란이 격화된 데 대해 배 부대표 등 정의당 지도부는 이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시위에 나선 이유를 재차 강조하며 "전장연이 무조건 현재의 불특정 다수의 불편을 볼모 삼는 시위 방식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조건 걸지 말고 중단하라"고 밝힌 이 대표를 맹공했다.
ⓒ 남소연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학교에서, 동아리에서 내부 구성원과 친밀한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수동적인 여성'으로 그려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정치적인 이견이 존재할 수 있고, 다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나의 경험이 '나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것'으로만 지독하게 해석되는 것은 그 자체로 불쾌한 일이다.
저는 누구의 배우자, 사모님이라는 방식으로 저를 호명하는 것에 대해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20년 넘게 장애여성운동을 한 인권활동가였고 지금은 정의당 부대표로 정치를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저는 장애를 가진 여성 당사자로서, 저의 경험과 가치로 사회적 발언과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저의에 대해선 대충 알겠으나 이런 저급한 방식은 정말 곤란합니다. 무조건 다른 사람을 끌어다 덮어씌운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 2022.4.5. 배복주 정의당 부대표 페이스북
지난 4일 정의당 배복주 부대표는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 지난 2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자신의 SNS에 장애인 이동권 시위의 본질과 무관한 사적 관계를 언급하며,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여는 단체와 정치권이 '밀접한 관계'로 엮여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꺼냈기 때문이다.
인권위에서 이준석이 장애인 혐오를 했다고는 말 못하니 무슨 사회적 영향을 밝히겠다고 하는지 기대합니다만 신속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박경석 대표님의 배우자이시고 최근에 종로에 출마하셨던 배복주 정의당 부대표 겸 여성본부장이 얼마전까지 인권위에서 인권위원을 하셨으니 관계가 있으신 분들은 알아서 이번 사안에서 회피해주십시오.
- 4월 2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페이스북
이 과정에서 배복주 부대표가 20년 넘게 장애여성운동을 한 경험은 인위적으로 탈락되었다. 한 정당의 부대표로 당원들에 의해 선출되고, 불과 한 달 전,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나선 그를, 이준석 대표가 '누군가의 배우자'로 부름으로써 그 사람의 정체성이 대표되었기 때문이다. 이동권 보장 시위에 나선 장애인 단체를 겨냥해 '볼모', '인질' 등의 표현을 쓰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몰아가며 갈라치기 정치를 했던 이준석 대표의 일관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배복주 부대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발언과 활동을 하는, 이준석 대표와 다르지 않은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과 무관한 사적 관계를 던져놓고 그 방향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내몰기 바빴던 이준석 대표의 의도는 무엇일까.
정치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 길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혐오를 집결시켜 정치의 책임을 회피하며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국민들 간의 싸움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준석 대표는 사과해야 할 일들을 더이상 미루지 말고, 정치인으로서 책임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