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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17. 2023

파란눈의 김치

김치, 식문화를 가로지르는 카테고리로 도약하다

예전 영국에서 다양한 프로바이오틱스 발효식품을 만드는 브랜드 런던 퍼멘터리 London Fermentary의 창립자 엘레나 데민스카 Elena Deminska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의 제품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고든 램지 Gordon Ramsey나 노부 마쓰히사 Nobu Matsuhisa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들에게 공급된 바 있다. 베스트셀러인 비건 김치는 고객들의 반복되는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유럽 순무 격인 터닙(turnip)과 보라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깔의 헤리티지 캐롯(heritage carrot)으로 담근 프로토타입 김치가 현지인들의 호응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생산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건, 러시아 출신인 그녀가 한 번도 한국의 김치를 먹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김치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한국인 고객이 준 레시피에 자신의 요소들을 더했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먹어본 그녀의 김치 맛은 상상과 무척 달랐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시고 생강 맛이 강했는데, 단순히 쉰 김치라고도 치부할 수 없는 기묘함이 있었다. 그렘린 같이 생긴 발효의 정령들이 입 안에서 무례한 축제를 벌이는 기분이었다. 당시엔 이거 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비건 김치라 그런 건 아니다. 엘레나와의 만남 몇 주 전에 취재를 갔던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의 김치가 확실한 대조군이었기 때문이다. 불교 사찰 음식에선 맵고 자극적이라 수행에 방해가 되는 오신채((五辛菜, 마늘, 파, 부추, 달래, 아위)와 동물성 재료의 사용을 금한다. 김치 양념의 주역인 마늘과 젓갈을 쓰지 않음에도 그 맛은 훌륭했다. 외국 김치의 생경한 맛은 런던의 다른 취재처였던 리틀 덕 앤 피클러리 Little Duck and Picklery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버릴 순 없어 음식을 만들 때 넣었지만 사서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이질적인 김치에 든 모종의 거부감은 모순이었다. 단지 내가 익숙한 맛이 아니었을 뿐이다. 같은 음식이라도 문화나 환경에 따라 만들고 취하는 방식이 다르다. 또한 원류의 범주를 벗어나 세계화된 음식은 여러 얼굴을 갖기 마련이다.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나 한국에서 유행했던 '로제 파스타'를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정통 까르보나라 역시 생크림이 아닌 달걀노른자로 만든다. 세계 각지에서 나름대로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피자와 파스타를 이탈리아 사람들이 비난한대도 그 흐름은 불가역적이다.  


김치 역시 세계화 과정을 거치며 하나의 카테고리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 김치 타코나 김치 부리또, 김치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처럼 현존하는 음식에 김치를 더한 퓨전 음식들이 주된 응용 사례였다. 이제는 세계의 많은 셰프들이 현지 재료와 자신들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김치를 구현하고, 이를 디시에 적용해 나가고 있다. 파인 다이닝 신에서도 감지되는 변화다.


오랜 시간 발전시켜 온 한국의 김치 레시피들에 새로운 요소들을 영입해 변주를 꾀할 수도 있다. 정관 스님은 젓갈과 마늘이 빠진 김치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토마토, 비트, 함초(samphire, 바닷가에 나는 소금기 머금은 식물) 청, 파프리카 등을 양념에 갈아 넣었다. 양배추와 콜라비 김치는 이미 폭넓게 즐기고 있다. 나도 이따금씩 슈가스냅피(sugersnap pea, 깍지 채 먹는 푸른 콩)로 김치를 담근다. 아삭하고 달콤하니 맛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우래옥이나 하동관의 김치 맛은 신뢰와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김치맛이 변했다는 표현은 음식에 대한 감을 잃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김치가 한국인에게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김치의 경계는 이미 한국인의 취향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재료의 김치가 나타날 것이다. 신선한 채소가 귀한 우주 식민지의 귀중한 영양원이 될 수도 있으려나. 그 기원이 무엇이든 미래 모습이 어떻든, 한국이 김치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외지인들에 의해 김치가 변질된다는 우려보다 국내에서 미시적으로 발달해 온 독창적인 김치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해 나가는 것이 훨씬 현명한 접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김치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고 우리 식문화에 영속시킬 수 있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좌> 런던 퍼멘터리의 비건 김치 (이미지 출처: 런던 퍼멘터리 웹사이트) <우> 슈가스냅피 김치


<좌> 김장을 준비하는 정관 스님 <우> 천진암의 사찰 김치 재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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