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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Aug 07. 2022

3. 우리는 왜 일하는가

우리 삶에서 '골든아워' 에 깊이 생각하게 되는 질문

    '우리는 왜 일하는가?' 앞선 글의 기획자의 일에 대해 견해를 나누며 북클럽에서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 우리는 결국 이 질문에 도달했다. 일을 잘할 수 있는 방법론은 많으며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을 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물어야 한다.


    어느새부턴가 울지 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와 같이 타인의 길을 비춰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료되곤 했다. 그런 직업을 특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이외의 전부를 내려놓은 사람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표정이 있었다. 자신의 하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표정. 포기는 시장의 논리에서는 주로 실패로 받아들여지지만 포기의 선택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오묘한 간극에서 나오는 표정. 그 표정으로 인해서 누군가의 현재 좌표와 목적지에 대해 잠시 갸우뚱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내려놓음으로 완강했던 세상에 조금씩 균열을 만든다. 그렇게 그들이 빚은 잠시와 조금은 질문을 만든다.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이 질문이 '왜 일하는가?'의 원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에게는 이 질문으로부터 일이 파생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 현재 시점에는 보람이 있는 삶이라는 답을 내렸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 줄곧 '보람'이라는 닉네임을 줄곧 쓰고 있다. (꿀팁: 닉네임은 조금은 무의미해야 한다. 안 그러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의식해서 들을 때는 없지만 사실 스스로에 대한 리마인더 이기도 하다.


    경계 위에 서있기 때문일까. 소셜 섹터에서 느낀점 중 하나는 이 분야는 일과 삶의 경계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발달 장애인 분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 때는 책 한 권, 지하철의 안내문, 약봉지의 소개 문구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였다. 북한 관련한 NGO에 일을 할 때도, 현재 스타트업의 대표님들의 스토리와 비즈니스 모델, 서비스를 살펴볼 때도 시점과 관점만 상이하지 느낌은 비슷하다. 그 속에 아름다움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것이 절대적이지도,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보람의 포인트를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서있는 자리가 변했다.


수술적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이고, 나는 환자의 몸이 스스로 작동해 치유되는 과정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종 인공생명유지장치들을 총동원해 환자에게 쏟아붓는 것뿐이고, 그것은 치료를 ‘돕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직접 환자를 온전히 살려낸다거나 살려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외과 의사로 살아가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외과 의사로서 나의 한계를 명백히 느꼈다. (『골든아워 1』, 이국종, p.41)


     경계에 있기에 어떤 분야와도 연결될 수 있다. 최근 읽었던 이국종 교수님의 골든아워에서 공감 가는 구절이 많았다. 감히 개인적인 삶이 비슷하기보다는 사회문제 역시 예방이 중요하지만 결국 수술이 필요한 지경이 되어서야 우리에게 드러나며, 사회 문제 해결 역시 문제 해결을 '돕는' 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점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이전에 아산나눔재단에서 진행했던 유스 프로그램에서 친구들과 앞선 인용한 구절의 '한계'와 '골든타임'에 대해서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있다. 수술 역시 벽을 무너뜨려 생명의 다리를 만드는 일이며, 사회 문제 역시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뾰족한 해법도 않는 문제들을 무너뜨려 다음으로 넘어가는 길을 만든다. 

    


노동자 계층의 중증외상 환자는 회복하여 업무에 복귀했다가 
다쳐 실려 오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책, p.33)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같은 책, p.148)


    그렇게 길을 걷다 보면, 사회 속에서 한 부분에 취약계층이면 다른 부분의 취약 계층일 확률도 굉장히 높다는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문제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한 부분의 해결은 다양한 부분의 개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문제 상황을 한 부분으로만 보거나 한 가지의 목적성으로만 진행되기도 어렵다.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 역시 청년들의 심리적 우울, 경제적 빈곤 등과도 모두 연결이 되어 있다. 또한 이슈 레이징, 직접인 문제 해결, 지원 정책, 정책에 대한 홍보, 피드백 등이 순차적일 수도 있겠지만 모두 이뤄져야 해결된다. '콜렉티브 임팩트'가 어렵지만 중요한 이유이다. 결국 우리의 비전과 미션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비전과 미션도 필요조건이거나 충분조건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팀원들 모두가 자주 아팠고, 아픈 것이 기본이 되어 아픔을 일상으로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플 때에 아프다고 알리는 일조차 없었다. 어딘가 부러지고 쓰러질 때가 되어서야 보고가 되었다. 그것이 마치 이곳에서의 생존법칙인 것만 같았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원론적으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사실 왜 지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지가 오래다.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이 유일한 장점이었으나, 그것을 위한 대가는 너무 컸다. 쉴 새 없이 고꾸라져 나가는 팀원들을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같은 책, p420- 421)


    어찌 보면, 많은 분야가 그렇겠지만 '왜 그곳/분야에서 일하세요?'를 굉장히 자주 듣거나 떠올리게 된다. 대답과 문제 모두 위에 제시되어 있다. 답은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문제 역시 '그것을 위한 대가도 너무 크다'는 점이다. 특히나 좋은 뜻을 품고 왔던 사람들 역시 '사실 왜 지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떠나곤 한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의 어려움과 지속가능성은 해결하거나 지켜내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왜 지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보람은 쉬이 오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만 훌륭한 삶은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왜 일하는가?'와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가?'라는 두 질문은 평생에 가져가야 할 질문일 것이다. 특히나 후자의 경우는 질문 자체가 생애 전체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동시에 잊어서도 안 되는 질문이다. 매주 올리는 글 역시 결국에는 이 두 질문을 거치거나 도착한다. 결국, 나 역시 글의 서두에서 나왔던 표정으로 나에게 그들이 질문을 남겨주고 건넸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대답이자 질문이 될 남겨주는 삶을 살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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