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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l 18. 2024

<담론>을 읽고

신영복, <담론>

창백하고 왜소한 언어에 싸여 살던 지식인이
감옥에서 벌거벗겨진 인간성을 마주하고
진실한 삶으로 나아가는 인문학적 여정.

인간의 질서는 허황된 스펙을 쌓으라 재촉하지만, 삶은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이 진리를 체감한 인간은 부단히 자신의 관념을 깨뜨리고 자신을 여행에 내던진다. 여행의 본질은 우연이다. 작은 불운도 용인하지 않고 완벽히 통제된다면 그것은 관광이지 여행이 아니다. 자신으로부터 떠날 용기를 가진 자만이 자기 삶의 여행자가 될 수 있다.

- (15)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 (345) 여행은 떠남, 만남, 그리고 돌아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자기를 칼같이 떠나는 것입니다.

여행하는 인간은 공부한다. 카르마, 즉 과거의 업보를 끊어내고, 타인을 미워하게 하는 구조를 조망하기 위해 사람을 공부한다. 사람을 분류하고 대상화하여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알 수 없다. 지식의 투구를 쓰고 지성의 칼을 휘두르는 얄팍한 수로는 왜소한 언어밖에 갖지 못하리라. 기어이 까발려서 졸렬한 스스로를 드러내고 인간의 민낯과 부닥치고 으스러져야 내가 쓰는 언어가 변한다. 이 변화는 숨길 수 없는 것. 나도 알고 남도 안다. 부서지고 분열된 헐벗은 여행자는 비로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사람의 처지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279) 애정이 없으면 아예 인식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애정이야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260-261)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그것은 그 여자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입니다. 그 여자를 돌로 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오만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무지함이 아닐 수없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순수한 어떤 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왜소한 인간관이 아닐 수없습니다.

자신을 분열시키는 공부에 완성은 없다. 한비자가 말한 '졸성'으로, 졸렬하지만 성실하게 노력할 뿐이다. 여행자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생성하고, 변화하고, 탈주하는 정체성으로 인간과 부대끼며 삶과 언어를 일체 시키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타인의 삶과 엉겨 붙어 씨름하고도 건너지 못한 격차, 그 암흑이자 우주가 나아감의 동력이다. 나아가는 길에 스스로를 의심하고 회의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견뎌야 한다. 공부하는 인간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도 오들오들 떠는 지남철을 닮았다. 불안은 진실을 향한 지남철인 것이다.

-(231)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공부의 끝에는 양심과 연대가 있다. 진정 강한 자는 양심을 지키는 자. 그러나 그것이 사사로운 강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자의 '대직약굴'처럼, 근본적 원칙을 지키되 사소한 것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유연하게 사고하라. 그리고 그 마음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도록 하라. 사람이 뒤집어쓴 역할, 권위 따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향해 연대해야 한다. 시적 언어로 삶의 다양성을 아우르고 양심적인 주체로서 타인과 연대하는 삶을 향해 부단히 스스로를 깨뜨리며 공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저 진펄 속을 기어 다니는 거북이'가 될지언정,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 (149) (장자) 초나라 위왕이 재상으로 모시려고 신하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당신네 나라에는 죽어서 비단 보자기에 싸여 옥합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거북이가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런 거북이보다 저 진펄 속을 기어 다니는 거북이로 살겠다"고 했습니다.



- (55-56) 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것은 언어의 왜소함입니다. 그 왜소함을 뛰어넘는 다양한 방식을 승인하는 것이 어쩌면 시적 레토릭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262) 기어이 '까발리는' 이유는 야박한 것이기보다 오히려 인간적인 것입니다. 어차피 잘난 것 하나 없는 우리끼리는 잘난 척하지 말고 함께 살자는 요구입니다.


- (278)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맺어짐이 없이, 즉 대상과 필자의 혼연한 육화없이 대상을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다는 환상. 이 환상이야말로 정보 문화와 저널리즘이 양산해 낸 허구입니다.


- (279) 관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애정의 수준일 때 비로소 최고의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애정은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바로 저널리즘이 양산하고 있는 위장된 객관성입니다. 애정이 없으면 아예 인식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애정이야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420)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입니다.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 됩니다.


- (426) '독버섯' 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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