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언어가 없었다. 인간은 짐승과 같았고, 자연신을 두려워했다. 인간은 내면의 목소리와 외부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해 무의식 속의 두려움을 신의 처벌로 투사했다. 이러한 감정적 인식은 인간 내면에 영성을 창조했다. 이로써 인간 정신은 야만과 영성 사이에서 방황하하게 되었다. 언어가 없는 무한대의 공간에서 인간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스스로의 위치를 묻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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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을 발견한 건 프로이트였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고 말했다. 라캉은 무의식을 상징계(Symbolic Order)라는 언어의 세계로 이해했다.
인간은 태어나 상상계(Imaginary Order)라는 이미지 단계에서 거울에 비친 상을 보고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자아상)에 매료되고, 그 전능성, 통제감, 합일감(oneness)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상상계는 모성의 세계다. 아이는 엄마의 욕망을 예상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생산한다. 하지만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만족스러운 환상은 곧 부권적 질서의 개입으로 무너지게 되는데, 그것이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증후군이다. 그때 인간이 사회화되며 들어서는 언어의 세계가 상징계이다.
상징계(Symbolic Order)는 모성애적 세계에서 만족스러웠던 최상의 쾌락, 주이상스(Jouissance)를 억압하는 법의 메커니즘이다. 대타자의 법으로 주이상스를 억누르는 팔루스(Phallus)라는 욕망의 대표 기표가 상징계 내에서 권력을 차지한다. 팔루스는 주이상스의 상실, 결여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은 팔루스의 권력 아래에서 영원히 주이상스 주변을 맴도는 기표의 연쇄를 쫓아다닌다. 욕망 기표의 연쇄를 쫓아 욕망의 대상만 바꿔 취하며, 영원히 만족을 지연하는 가련한 존재로 살아간다. 팔루스가 선사하는 작은 쾌락 조각들을 핥짝핥짝 핥으며 작은 만족으로 위무하며 살아간다. 욕망의 대상을 소비하고, 감정을 소진하며 애타게, 애타게.
인간이 그토록 작은 만족만 붙들고 맴돌고 있는 중앙에 있는 것은 주이상스의 상실, 공백이자 유령이다. 그것은 인간 외부의 것이고, 실재계(The Real)의 큰 사물이며, 실현되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상상계의 유아기적 환상으로 만든 자아상을 깨뜨리고, 매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주체로서 상징계의 법을 깨뜨리는 순간, 잠시 공백의 나락에서 주이상스의 자락을 엿볼 수 있을 뿐, 그 공백에 투신할 수 없다. 상징계 법의 극한은 칸트이고, 상징계 언어 너머 미학적 법의 극한은 사드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죽음뿐. 결국 프로이트가 발견한 죽음충동, 그 반복강박에 빠진 트라우마가 죽음으로 세계와 합일되려는 강렬한 자기장이고, 그것이 우리가 맴돌고 있는 공백이며, 쇼펜하우어가 주장했듯 고통과 권태 사이의 진자운동과 다름없는 삶에서 주이상스를 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욕망을 제거한 죽음과도 같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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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현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인데, 아직 제대로 공부는 못했다. 교수님은 강의 내내 매혹적인 말을 쏟아 낸다. 그때만큼은 하루종일 시달렸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수님 강의 몇 번씩 듣느라고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 마감이 다가온다. <이상한 이상 시인의 이상>에 대해 발표를 준비해야 하고, 시를 창작하고 분석하는 과제도 있다. 인권 행사 취재도 다녀와야 하고, 매 주말 팀원들 대신 대타 근무도 뛰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모두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내가 결국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인간은 자기 내면에 숨은 짐승과 영성의 극히 일부분만 의식하고 살아간다. 문학가나 철학가나 정신분석가나 하는 일은 비슷하다. 인간 본연의 야만성과 영성을 언어화하는 것. 문학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밀란 쿤데라 曰)'에서 인간 본연의 삶을 그리되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고, 철학은 진리에 가장 부합하는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고, 정신분석은 야만성을 인정하고 증상에 숨은 진리를 발견하여 인간 스스로 짐승이자 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백상현 교수님은 말한다.
자기는 어쩌면 거대한 쾌락주의자라고. 얕고 즉각적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상을 소비하는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법과 언어의 세계가 미끼처럼 던져주는 쾌락에 만족하지 못해서 가치와 추상으로 가는 지도를 그리려는 것이라고. 주이상스의 쾌락을 탐하여 스스로의 진리, 믿음, 매혹으로 가는 지도를 찾는다는 말일 것이다. 나도 거대한 쾌락주의자인데, 작은 쾌락에 만족하지 못해 차라리 죽음에 매혹되어 있는데, 생각했다.
교수님의 '철학자' 정의도 내 정수리를 광광 울렸다.
'사람들이 철학 공부를 하려면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하는지 자주 묻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자는 어떤 책을 읽든 자기 손에 쥔 책 한 권을 철학책처럼 읽는 사람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1년 내도록, 글귀에 매혹되어 느리게 읽는 사람이다. 글을 이해하려 애쓰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스스로 의심하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의미를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감은 타인의 지식 체계에 속박되어 대상과 동일하다는 안락한 감정일 뿐이다. 타인의 의미와 지식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 공간을 창조'하는, 일종의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할 때 상대의 말이 의미가 없더라도 그 허접한 말을 듣고 싶어 하고, 들어야 잠이 오는 것, 대단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의미를 가지는 것, 그것이 철학하기의 태도다.' 내 멋대로 재구성한 말이지만 취지는 맞을 것이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어 좋다. 어떤 고통은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욕망하게 하고, 변하게 한다. 무사한 인생에서 영감 없이 밥알을 씹다가,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하루 끝에 새로운 언어가 쏟아지면 삶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춤추느라 발이 조금 까지고 뭉개지더라도 기껍게 춤추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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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가능성은 예외적 공간의 창조에 있다.
- 내가 알고 싶었으며 그러한 방식으로만 알려고 했던 사랑의 대상인 타자가 더 이상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닌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즉 그 자신의 고유한 타자성으로 출현할 때에 그것은 일종의 공백 또는 유령과 같은 모습이 된다. 그리고 사랑의 진리는 바로 그러한 순수한 타자성으로서의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실현된다.
물론 그와 같은 받아들임을 위해서는 자아의 공간에 균열을 내어 빈 공간을 확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더 이상 알 수 없으며 알기를 원치 않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타자의 유령은 공백의 형상일 테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건은 자아의 질서 잡힌 영토를 찢어서 균열의 자리, 공백의 자리를 마련하는 고통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中, 백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