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 아르노
'잡년으로 선택될 힘',
이런 경박한 언어에 해방감을 느끼는 편
그래서 거친 사람들을 좋아하나
내 인생은 흠결 없는 이미지와의 전쟁이었다.
'꼭~해야 한다, 절대~해서는 안된다'와의 싸움이었달까.
강박적 사고는 나를 성장시키지만 아무리 옳더라도 언젠가는 깨고 나아가야 할 벽이 된다.
아무리 애써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미워하고 은폐했지만,
반항하고 회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맞닥뜨리고 받아들여야 함을 이해한다.
이제는
흠결 있는 나를 미워하지도 않고
내 흠결을 들추어내는 타인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나와 같은 흠결이 있는 사람은 감싸고
나와 달라 도자기 인형 같이 웃는 사람을 마음껏 부러워한다.
나는 나의 결핍을 미워하지 않기에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나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시기한다 하여도 나 또한 그런 결핍을 가진 인간이기에 나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내게 흠결이 있다고 소리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지나치게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나간 일에 사로잡혀 그때의 말만 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목격자들에게 내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것도 모두 그만뒀다.
그 강렬한 반응 아래에는 내가 이분법 중에서도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내적 외침이 있다.
현실이 어쨌든, 사실이 어쨌든 그렇게 외쳐대서야 정작 봐야 할 것을 놓치는 일이 많다.
옳음, 사랑, 정당성, 그 어떤 합리적 사유로도 어딘가 사로잡히는 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여러 강박과 함께 살아간다.
흠결을 없애고자 하는 흠결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잡년으로 선택될 힘을 갖지 못해, 욕망을 은폐해 버린, 얼어붙은 여자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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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은여자 >, #에니아르노
78 흠집, 골치 아픈 단어. 흠잡을 데 없는 무결점 마리아. 어떻게 난폭함과 욕망 같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은폐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80 나는 나 자신이 미웠다. 소녀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투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할 수 없지. 나는, 나를 숨기는 편이 나를 위해서 더 낫다고 느낀다. 이런 태도가 나를 구해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나는 욕망과 짓궂음, 견고한 어두운 측면을 내 안 깊숙이 숨기며 나를 보호했다.
134 마린은 최소한 세 명의 남자와 잤고 그래서 그녀는 창녀 취급을 받는다. 그들 표현에 따르면 나도 어느 정도 창녀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자유, 잡년. 나는 잡년으로 선택될 힘이 나에게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134 그리스 비극과 라신의 비극은 전부 내 자궁 안에 들어 있다. 온갖 부조리 속의 운명. 어느 햇살 좋은 날, 당신의 인생이 한 방에 끝나버린다.
135 남자아이는 자유롭게 욕망할 수 있어. 하지만 넌 안돼. 이 아가씨야! 참아, 그게 관례야. 저항하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방어 게임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몸을 영역으로 구분해, 허락된 영역, 현재 작전이 진행 중인 모호한 영역, 금지된 영역으로 나눈다. 아주 조금씩 포기해 나가야만 한다. 하나하나의 쾌락이 나에게는 실패고 그에게는 승리다.
250 끝에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이제 나는 곧 내가 끔찍이 싫어했던, 주름지고 비장한 얼굴들을 닮아가리라. 미용실 샴푸대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얼굴들을. 얼마나 걸릴까. 더는 숨길 수 없는 주름,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이미 나는 그런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