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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페르소나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by 김반장

가장 초라한 인간에 깃든 신.

흙과 오물, 배고픔에서 태어난 인간은

황량한 영혼에 물을 주고,

슬픔의 우물에는 햇볕이 되어 삶을 살찌웠다가

독버섯이 핀 태고의 경계에서

피로 얼룩진 비인간의 얼굴들과 마주한다.


소설에서 남자는 문명과 타나토스의 상징이고, 여자는 에로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을 아는 남자들은 딸의 삶을 규정하고, 신의 게임에 몰두하고, 과제에 내달리며 허무를 견딘다.

고아 소녀 크워스카는 안젤리카 풀과 나쁜 인간, 죽은 아이와 산 아이(삶과 죽음)가 모두 몸을 뚫도록 내버려 둔다.

크워스카는 '모든 걸 관통하는 힘을 보았고, 그 힘이 작동하는 순리를 이해했다. 우리의 위와 이래에 펼쳐진 또 다른 시간과 또 다른 세계의 윤곽들도 보았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 또한 보았다.(26)'

마치 도덕경의 '현묘한 도'가 현현한 듯 그녀는 기이하고 음험하며 오묘하게 빛난다.

이처럼 죽음(타나토스)과 생명(에로스)이 뒤섞인 땅이 바로 태고다.

태고는 깊고 어두운 흑강의 무자비한 힘과 생기발랄한 백강이 만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이 혼란한 땅에서 인간은 슬프다.
인간은 모든 얼굴을 볼 수 없다.
신이 있냐고 아무리 물어도 알 수 없다.
문명은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문명은 생존의 환상이고 흙에서 알알이 솟아나는 생명은 불가해하다.


피부로 느껴지는 현존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악은, 고통은, 죽음은 왜 존재하는가, 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고민들은 하고자 하면 생활에서 유리되고 안 하고자 하면 짐승이 되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서

신은 인간의 역사 내도록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신의 점멸이 삶의 부조리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철학적 명제는, 본질에 있어서 부조리한 삶의 단면들에도 죽지 말고 살아있자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백지와 같은 무의미에 쌓아 올린 선택(본질)이 삶을 구성한다는 영미권의 실존주의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 자체의 경이를 바라보자는 하이데거적 실존주의로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인간 존재는 죽음과 전쟁 앞에서 무의미에 쓰러지는 종이 인형이 아니라 한강이 '흰'에서 말했던 흰 것처럼, 잠재태로 우글거리는 무한이자 공(空)이라는 것이다.




< #태고의시간들 >, #올가토카르추크

첫 문장)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p15 천사들이 가진 단 하나의 본능은 바로 연민이다. 창공처럼 무겁고, 무한한 연민... 이것은 천사들이 가진 유일무이한 감정이다.

p18-19 크워스카는 외부의 것을 내면으로 동화시키면서 세상을 배웠다.
쌓이기만 하는 지식은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단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겉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는 사람은 끝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존재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중략).. 달리 보면, 그녀는 태고 전체를, 이곳에 깃든 모든 고통과 희망을 제 것으로 소화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워스카의 대학교였고, 부풀어 오르는 배는 졸업장이었다.

p82 그 조그만 아이는 작고 황량한 그의 영혼에 꼭 들어맞았다.

p150-151 시간을 초월한 신이 시간과 시간의 변형된 형태 속에 현존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땐(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변화하고 움직이고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고 흔들리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주시하면 된다.
..(중략).. 신은 모든 과정 안에 있다. 신은 모든 변형 속에서 박동한다.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조금만 있고, 때로는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신은 그가 거기에 없는 순간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과정의 일부인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불변의 대상을 고안해 내고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완벽하다고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신의 불변성은 기정사실화되었고, 사람들은 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그렇게 상실하고 말았다.

p231 이제야 그는 뭔가 부족한 듯한 이 알 수 없는 느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만물의 근저에 깔린 슬픔, 모든 사물과 현상에 깃들어 있는 슬픔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한꺼번에 모든 걸 파악하고 아우른다는 건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타가 마치 이지도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네 번째 얼굴은 볼 수가 없어. 그게 바로 태고의 중심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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