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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n 20. 2024

간단하게 국수나 끓여 먹자고 말했다가

쫓겨났다는 남자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몇 해 전,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을 재미있게 봤다. 악귀를 때려잡는(?) 영웅들의 통쾌한 이야기인데 단점이 하나 있었다. 늦은 시간 이걸 보고 자면 종종 누군가 죽거나 다치는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악귀가 안 무서울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한데 사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이 하나 있었다. 주인공들의 비밀 아지트로 나오는 ‘국숫집’이었다. 늦은 밤 국숫집 장면이 나올 때마다 저 김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잔치국수가 다 내 입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에 악귀보다 내가 먼저 기절해 버릴 거 같았다.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주인공 추 여사 솜씨를 능가하는 우리 엄마 이 여사표 국수를 먹고 싶지만 나는 결혼을 했고, 엄마는 멀리 살고. 하지만 도저히 국수를 안 먹고는 못 배기겠는 면사랑 시청자는 결국 다음날 멸치육수를 내고야 마는 것이다. 볶은 야채들과 계란 지단도 필요한 그 번거로운 잔치국수를 사십 분, 오십 분 준비하고 기어이 차려낸다. 이렇게 만든 잔치국수가 사라지는 건 십 분이면 충분하다.     


음식이란 게 원래 그렇다지만, 그중에서도 이렇게 정성껏 세부 재료를 준비하고 그 준비한 시간에 비해 너무나 게눈 감추듯 없어지는 음식 베스트는 ‘김밥’과 ‘국수’라고 생각한다. 김밥은 가끔 밥솥에 있는 남은 밥으로 시작할 때도 있는데 국수는 0부터 시작이다. 소면을 맛있게 삶아 빡빡 헹구는 것부터 적잖은 품이 든다.(게다가 5인분이라면...윽) 요즘은 코인 육수도 나와서 더 간편하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멸치, 디포리, 다시마, 양파, 대파 푹 끓인 육수 냄새는 코인이 절대 따라갈 수 없지.


고명으로 얹는 재료도 물론 상황에 따라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내가 여태 먹어온 이 여사표 잔치국수는, 곱게 채 썬 당근에 호박양파 볶음, 참기름 조물조물 버무린 신김치 무침, 계란 지단, 직접 만든 청양고추 양념장까지 얹은 그야말로 정석의 잔치국수였다!


엄마는 내가 국수 만들어 먹기 귀찮다고 하면 ‘국수가 뭐가 귀찮냐, 넌 대체 안 귀찮은 게 뭐냐’며(잠깐만, 이거 앞선 글 잡채 이야기에서 본 문장인데...) 핀잔을 주곤 한다. 그렇지만 분명 그건 엄마가 손이 빨라서일 거고, 엄마가 오랜 경력직이어서 그럴 거고, 엄마가... 엄마가... 아니다, 엄마도 분명 번거로울 거다.

     

‘오늘은 간단하게 국수나 끓여 먹자.’라고 말했다가 쫓겨났다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는 않지만, 간단하게 국수나 끓여 먹잔 말은 확실히 거짓말이다. 아마 차리는 입장이 아니라 먹기만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온 말일 테다. 먹을 땐 호로록호로록, 이보다 간단하게 사라질 수 없는 국수. 넙죽넙죽 받아만 먹던 시절에야 엄마 말대로 간단한 건 줄 알았지만 이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린 아들들 앞에서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국수 해줄게."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야지. 공들여 끓인 국수인 걸 꼭 생색내야겠다고 철없는 나는 종종 다짐한다.     


항상 ‘차리는 입장’이면서도 ‘간단하게 국수나’라는 말을 하는 이 여사. 어쩌면 그 말은 먹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사랑하는 쪽’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 여사는 손주가 셋이다. 가끔 우리 다섯 식구가 놀러 가면 이 여사는 대충 라면으로 점심 때우자는 내 말을 안 듣고 굳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잔치국수를 끓여 내어 준다.

"할 수 없는 거면 몰라도 할 수 있는 요리는 하나도 안 귀찮다."라면서. 베테랑 주부의 관록 같기도 하지만 거기엔 한없는 내리사랑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지난주 엄마집에 갔을 때도 엄마는 부엌에 오래 서 있었다. 감자탕을 준비한다고 서 있고, 부추전을 굽는다고 서 있고, 애들 국수 끓여줘야 한다며 서 있었다. 부담스러워서 친정 자주 오겠나 했더니, 입 짧은 둘째 손주가 국수 하나는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안 끓일 수 있냐고 호박을 볶고 계란을 부친다.

가족의 밥상을 책임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내게 잔치국수는 김밥 다음으로 망설여지는 메뉴다. 그렇지만 별수 있나.

“엄마가 해준 국수를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라고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어린 아들을 보고 나 역시 어떻게 또 국수를 끓이지 않을 수 있을까!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을 보다가 그려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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