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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n 13. 2024

이건 안 먹어봐도 맛있는 잡채다!

잡채도 마음도 고마운 날


자고로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랬고,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랬는데... 그날 난 비주얼만 보고 한눈에 낯선 잡채를 판단해 버렸다.


'이건 무조건 맛있는 잡채다!'






거실에서도 담요를 덮고 싶을 만큼 쌀쌀한 겨울의 하루. 늦은 오후에 벨이 울렸다. 옆집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방금 막 한 것 같은 반들반들한 잡채 한 그릇을 들고 계셨다.


"잡채 좀 했어. 그릇은 일회용이니까 먹고는 그냥 버려!"     

잡채를 너~~무 좋아하는데 너~~무 못 만드는 사람으로서 나는 감탄을 아낄 재간이 없었다.     

"어머머머머 저 잡채 엄청 좋아해요! 근데 손도 많이 가고, 어쩌다 만들어도 맛을 못 내겠어서... 이 귀한 걸 이렇게나 많이 주셔도 돼요?"

"아이고. 잡채처럼 쉬운 게 어디 있다고!"    

 

그 정도 세월을 주방 책임자 비슷하게 살면 잡채 정도는 눈 감고도 하게 되는 걸까? 우리 엄마도 몇 번 '잡채처럼 쉬운 음식이 어딨냐!' 한 적이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말 그래서이든, 내 부담을 덜어주려 한 말이든, 어쨌든 나는 안다. 잡채는 간단하지 않다는 걸!

              

할머니가 우리에게 음식을 나눠주신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다. 그전 해엔 김장을 하시고 우리집 문을 두드리셨다. 널따랗고 오목한 포트메리온 접시에 갓 담근 김장김치가 이만큼이나 담겨있었다.     

옆집에 산지 2년째였지만 그렇게 친하고 익숙한 사이도 아니었고, 오며 가며 인사는 하지만 뭘 주고받은 적도 딱히 없고 해서 예상하지 못한 김치였다.(그때만 해도 감염병이 한창이던 시기라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가끔 집에서 한 음식 나눠주고 싶어도 여기 식구들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요즘 젊은 엄마들은 이런 거 싫어하기도 하니까 고민만 하다가 조금 가져와봤어요."    

"세상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없어서 못 먹죠! 저 새로 담근 김치 진짜, 완전, 좋아해요!"               

아삭아삭한 김장김치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는 과일로 접시를 채워 돌려드린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옆집 복도에 줄 서 있는 '절임배추' 상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 상자를 보자마자 저번에 먹었던 시원한 김치맛이 생각나면서 동시에 나는 염치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 호옥시... 아... 먹고 싶다...'


김장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나도 모르게 포트메리온과 김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하... 나자신아 이렇게 양심 없고 불량한 사람이었니?   

그랬던 그날 저녁. 거짓말처럼 1년 전과 똑같은 접시, 똑같은 비주얼의 다홍빛 김치와 조우했다.     


"한 접시 가져와봤어. 맛없어도 난 몰라!"


이 무슨 '오다 주웠다' 급의 시크함이란 말인가... 우리 식구는 그 김치를 다음날까지 아끼고 또 아껴서 싹싹싹 열심히도 먹었다.               

그렇게 김장 김치를 두 번이나 얻어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잡채까지 게 된 것이다.

    

겉만 보고 판단한 이 잡채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이 잡채를 한 젓가락 와앙 네 번을 집어먹고, 다섯 번째 이따만큼 입에 넣고 와구와구 씹으면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켜 이 글의 초고를 썼다. 생각나는 대로 막 썼다. 이 맛과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남편도 맛보여 줘야 하니 여섯 번째 젓가락은 자제하고 그릇에 실리콘 뚜껑을 덮어두었다.     

면은 적당하게 잘 익어서 아주 촉촉했다.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간도 어쩜 이렇게 딱인지. 시금치, 당근, 목이버섯, 양파... 눈으로만 봐도 벌써 맛있고 호화로운 잡채. 솜씨와 맘씨가 모두 좋으신 이웃을 만나 그 한겨울에 입맛이 싸악 돌았다.     


워낙에 내향인이라 사람 만나고 사귀는 걸 즐기지 않는다. 노력해도 잘 되질 않는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이사를 다니며 살아온 곳곳마다 내게 먼저 말을 걸고, 마음을 내주는 사람이 꼭 한 명은 있었다. 무심하게 고구마를 나눠주고, 아이들 놀이터 간식을 넉넉하게 준비해오는 사람들. 그 동네에서 그 시절을 무탈하게 지낸 것은 그런 이들 덕분이다. 아무리 혼자가 좋아도 역시 사람은 혼자선 못 산다는 걸 책 말고 피부로 느끼게 해 준 이들. 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사람들.

           

맛있는 잡채를 먹었던 그날처럼 누군가 나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보여주는 날이면, 나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안 챙겨줘도 그만인 잡채 한 접시 때문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안겨줄 기쁨이 있을까 생각해보고 떠오르는 이름들을 적어보았다. 마침 연말은 그렇게 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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