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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n 27. 2024

덕질의 맛, 솥밥의 맛

'좋아하는 마음'이 이끈 새로운 세계


예능 프로 <나 혼자 산다>를 종종 본다. 평소라면 출연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뭘 먹거나 말거나 나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회성 재미로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그날의 회차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C가 냄비까지 챙겨 와서 W에게 해주는 연어 요리를, 해산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건 그들이 나의 ‘최애’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덕질’ 중이다. <인사이드아웃 2>의 주인공 라일리처럼 나도 이젠 좀 있어 보이는 음악이랑 가수를 좋아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데... 왜 아직까지 아이돌 덕질을 하고 있는 거냐!!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사람 또는 일을 ‘덕후’라 부른다. 덕후가 그 대상에 애정을 바치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덕질’이 된다. 대상은 물건이 될 수도, 어떤 취미가 될 수도 있지만, 흔히 덕질이라 하면 ‘아이돌의 팬’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용어설명 하나 더. ‘최애’는 가장최(最)와 사랑애(愛)를 합한 단어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룹 또는 멤버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꼭 최애의 요리가 아니더라도 <편스토랑> 같은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맛있어 보이는 건 따라 해보기도 한다. 요리를 맛깔나게 잘한다고 소문난 여러 셀럽의 레시피를 메모해 두고 직접 해 먹어 보기도 하고. 근데 그건 단순히 '요리'를 좋아하는 마음에 좀 더 가깝다면, 이번 연어 건은 요리를 바탕에 둔 상태에서 ‘최애’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큼직하게 작용했달까? 예를 들면 이런 마음이다.

    

‘아니, 너네 둘이 그걸 만들어 먹었어?’

‘요리까지 잘한다니, 넌 못하는 게 뭐야?’

‘대체 무슨 맛인데 너네 그렇게 행복하게 웃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네가 먹은 거랑 똑같은 상차림으로 내가 한번 먹어봐야겠어!’  

    

(이쯤 쓰니 이 글을, 이 마음을 이해할 독자들이 몇 명이나 될까 싶어진다....)

오랜만에 눈에 생기를 가득 품은 채로 나는 인생 첫 프랑스산 주물냄비 검색에 들어가  버다. 이런 스스로가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요리는 어차피 장비빨이니까! 내가 이 비싼 냄비를 사서 ‘연어솥밥’ 한번 해 먹고 요리에 손 뗄 정도로 요리 문외한은 아니니까! 이거 사면 나는 어쨌든 엄청 잘 쓸 거니까 하루라도 빨리 사는 게 이득이야! 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한국의 문화와 K-POP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연예인 덕질 특히 아이돌 덕질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가 않다. 나 역시 ‘연예인이 밥 먹여주냐’ ‘팬클럽 하면 밥 먹여주냐’는 소리를 2n년 전부터 들어왔다. 아니, 어머니 아버지! 애초부터 밥 먹으려고 덕질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대꾸하며 살아왔는데 살다 보니 덕질이 밥을 먹여주는(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고 할 때의 은유적 '밥'이 아니라, 진짜 문자 그대로의 ‘쌀밥'이라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뭐 어때!) 놀라운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덕질이 밥 먹여준다는 걸 입증할 기회가 왔다.


‘너네가 만들고 같이 먹었던 저 연어솥밥 나도 한 번 똑같이 만들어볼게!’

    

그렇게 최애의 연어솥밥 한 냄비 덕에 생전 처음 시도한 일들이 생겨버렸다.

전기밥솥으로만 밥을 지은 지 10년인 내가 '솥밥 하는 법'을 샅샅이 검색하고 공부한 것. 저렴한 코팅 냄비만 쓰다가 커피 한 잔 값의 대략 50배 정도 되는 비싼 주물냄비를 주문한 것. 고등어와 삼치가 아닌 연어살 300g 한 팩을 내 손으로 사 온 것!

진짜 별 걸 다 해보는구나 하면서 손은 이미 쌀을 불리고 있었고, 버터 녹인 팬에 연어살을 지글지글 굽고 있었다. 까슬까슬하게 그을린 듯하면서도 윤기 나게 연어를 굽고, 맨 나중에 뿌려줄 초록 쪽파도 보기 좋게 다졌다. 솥밥 뜸을 들이는 동안 양념장을 만들면서, 최애의 밥상 하나로 시작해 솥밥 양념장을 만드는 단계까지 온 내가 웃겨서 웃음이 실실 났다.    

 

삼치, 고등어만 구워 먹을 줄 알았는데, 선홍빛 연어를 이렇게 우리 집 부엌에서 직접 구워 먹어 보는 날이 오다니. 새로웠다. 첫술은 밥 한 숟가락에 연어살을 그대로 떠서 먹고 그다음엔 연어살을 슥슥 으깨서 양념장을 넣고 비벼 먹으라는 최애의 말을 따랐고, 식구들과 한 냄비를 깨끗하게 비웠다. 냄비 벽에 눌어붙은 누룽지에서도 구운 연어의 풍미가 느껴졌다. 연어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친구한테 언젠가 이 밥을 꼭 한번 해줘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걸 계기로 나는 솥밥의 세계로 스며들었다. 콩나물, 가지, 표고버섯, 소고기, 돼지고기, 오징어., 전복... 좋아하는 재료를 재량껏 넣어 조합해보기도 하고, 똑같은 냄비가 있는 친구들과 메뉴를 공유하기도 했다. 내 솥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덕후의 마음과 음식, 전혀 관련 없을 것만 같은 두 가지가 이런 식으로도 만나는구나. 어떤 이들은 최애가 읽은 책을 똑같이 사서 읽으면서 독서의 기쁨을 발견하하고, 최애가 좋아하는 노래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들으며 음악의 다양성을 알아기도 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까? 생각해보지 않았던 솥밥의 세계로 나를 떡하니 데려다 놓은 이 마음이 나를 또 어떤 세계로 이끌까? 또 모른다. 팬심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엮여 그 글로 밥값을 벌어 맛있는 한 끼를 사 먹곤 '덕질이 이렇게 밥을 먹여주네!' 할 날이 올지. 뭐가 됐든 상관없다. 이 마음을 통해 언젠가 또 만나게 될 새로운 맛을 나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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