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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l 04. 2024

남타커, 남끌라를 이겨버린 남해밥

어떤 남해밥은 위로다


‘오늘은 뭐 해 먹나’ 고민하지 않는 주방 담당자 있을까? 우리 엄마도 그랬다. 나한테 종종 물었다. 딸, 오늘은 뭐 해 먹을까? 대답을 한 날도 안 한 날도 있었겠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이거다. 내가 엄마한테 반문했을 때다. 엄마는 뭐가 먹고 싶어? 그럼 엄마는 종종 대답했다.

“남이 해준 밥!”

남해밥. 그땐 줄여 쓸 생각도 못했던 남이 해준 밥! '남타커(남이 타준 커피)' '남끌라(남이 끓여준 라면)' '남해밥(남이 해준 밥)' 이젠 이런 줄임말이 익숙하다. 경제적이고 좋네. 남해밥이라니, 정말 ‘별다줄’이다(별 걸 다 줄인다)!  




          

먼 지방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마음이 심린했던 어느 날, 남의 집에 가서 남이 해준 밥을 먹었다. 낯을 많이 가려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선 일대일 만남을 환영하지 않는 성격인데,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 않은 S의 '밥 먹으러 와요'라는 초대엔 이상하게 핑계도 없이 응해버리고 말았다. 그날 나는 S의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니 어쩌면 도착해서도)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나, 왜 가고 있나, 가서 무슨 말을 하나, 어색하면 어쩌나 라며 백오십 가지의 걱정을 했다.(전국의 대문자 I형들, 끄덕끄덕 해주세요)


낯설지만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던 S의 집 거실에 앉아 몇 마디를 나누다 보니 꽤 자연스럽게 점심때가 되었다. ‘잠깐 앉아 있어요’ 하고 주방으로 간 그녀는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결혼 전 남자친구 집에 저녁초대를 받았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달그락달그락 소리에 조금은 좌불안석이었던 그때.


"계란 완숙으로 먹어요, 반숙으로 먹어요?"

부엌에서 들려오는 뜻밖의 질문에 미안함과 불편함 따윈 잊고 "완숙이요!" 외쳐버리고 말았다. S는 밥과 청국장, 김치, 콩나물무침, 어묵볶음, 계란프라이를 각각 알맞은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점심상을 차려냈다.    

 

"와..."

점심을 거르거나 대충 때우기 일쑤였던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양이 푸짐해서도 아니었다. 구첩반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밥상은 왜 그렇게 풍성해 보였을까? 게다가 이토록 예쁜 계란프라이라니! 노른자의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고 샛노란 색감까지 그대로 살아있는, 그 위로 선명한 초록 파슬리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는 정성 담긴 프라이를 보니, 나도 계란프라이를 진작 이렇게 할 걸, 하는 별 거 아닌 후회까지 드는 것이었다. 흰 쌀밥을 한 숟가락 퍼서 뜨끈한 청국장에 푹 적셔 입안 가득 넣었다. 아침에 했던 백오십 가지의 걱정이 따뜻한 밥 한술과 함께 싹 다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콩나물이랑 청국장은 이 앞 잘하는 반찬가게에서 산 거예요."

맛있게 먹는 나를 보며 S가 민망한 듯이 말했다. 사 온 반찬이라는 게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아들이 일곱 살일 때 언젠가 갓 지은 쌀밥을 한 입 먹고는, "뜨거운 밥을 먹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날 S가 차린 점심을 남김없이 싹싹 먹은 내가 그랬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왠지 든든해졌다.

밥과 청국장이 뜨거웠기 때문은 아니다. 남해밥이 좋은 가장 흔한 이유, 내 노동이 섞이지 않은 밥을 편하게 얻어먹어서도 아니다. 프라이 하나에 반숙파인 지 완숙파인 지를 물어 봐주는 작은 배려,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인연이었을 텐데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그녀의 친절을 몸에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아마 S가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주었대도 나는 똑같이 감동했을 것이다. 뭐가 되었든 나를 위해 내어 준 움직임과 공간과 시간일 테니. 상대를 향한 애정 없이는 차릴 수 없는 밥상일 테니 말이다.  

         

지난달, 예능 <유퀴즈 온더블록>에 나온 류수영 배우가 요리 얘기를 하면서 말했다.

“밥 해줄 테니 오라는 사람 요즘 진짜 없어요. 그런 친구 있으면 진짜 눈물 날 거 같지 않아요? 얼른 와 내가 밥 해줄게, 그게 되게 큰 위로예요.”     


호텔의 근사한 조식도, 소문난 맛집에서의 외식도 남해밥의 하나이긴 하지만 나와 관계 맺은 사람이 나를 위해 차려주는 ‘남해밥’은 다르다. 맛까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 밥상의 힘은 아마 맛보다는 마음에서 나올 것이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남해밥을 차려준 그녀의 마음을 동력 삼아 나도 누군가의 빈 마음에 위로가 되는 밥상을 한 번쯤 차려내고 싶다.

계란 노른자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곱게 프라이할 때마다, 어느 시장 안쪽에서 푹 끓인 청국장 냄새가 새어 나올 때마다, 익숙한 동네를 떠나온 이곳에서 마음이 조금 쓸쓸해지려 할 때마다 그녀의 집에 차려졌던 작지만 큰 밥상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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