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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l 11. 2024

시간이 남아돌아서 캐릭터도시락을 만든다고?

캐릭터 도시락 만드는 사람 뒷목 잡고 쓰러질 소리


올해의 네 번째 소풍 도시락을 싸는 날이다. 1학년 한 번, 3학년 두 번, 6학년 한 번. 소풍 도시락에 힘을 많이 안 주는 편이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도 그랬다. 요리도 싫어하지 않고 아기자기한 것도 좋아하지만 ‘캐릭터 도시락’만큼은 정말이지 내가 손댈 수 없는 분야 같다. 애들한텐 좀 미안하지만 어린이집 시절부터 소풍날이면 속으로 빌었다. 제발 엄청난 도시락 싸 온 애가 우리 애 옆에 안 앉게 해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지난 4월에 김밥 도시락 가지고 체험학습 다녀온 1학년 막내가 말했다.   

  

"엄마. 친구들 도시락 봤더니 김밥 싸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 같더라?"

"그럼 애들은 뭘 싸 왔어?"

"소시지를 문어처럼 한 것도 있었고, 밥이 폼폼푸린인 친구도 있었어! 눈도 달리고 볼도 빨갛게 색칠 돼있고. 이건 내가 친구 거 먹고 거기에 꽂혀있던 거 가져온 건데 봐봐."    

 

동물픽이었다. 왜 그, 플라스틱 이쑤시개 같은 건데 손잡이 부분이 동물 대가리... 아니 귀여운 동물 얼굴로 되어있는 알록달록한 그런 동물픽! 방울토마토든 주먹밥이든 비엔나소시지든 어디든 꽂기만 하면 도시락이 레벨업 된다는 동물픽!   

  

"정말로 김밥 싸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에이 그럴 리가. 당연히 있었지."

"누구?"

"선생님!"


.......     

웃긴데 안 웃긴 이 얘기를 친정엄마한테 해줬다. 능력자들이 많다고, 김도 치즈도 전용 펀치로 뚫어서 눈코입 만들고, 케첩으로 볼터치 해주고, 귀 달고 발 달고, 색 내려고 강황 넣고 밥 짓고. 이게 말이 쉽지 자칫하면 망한 도시락 출품작 되는 거라고 나는 못 할 거 같다고. 근데 옆에서 같이 얘기를 듣던 권사님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는 거다.   

  

"시골 엄마들 직장 안 다니니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거 만드는구먼."     


이 무슨 캐릭터 도시락 만드는 엄마들 뒷목 잡고 쓰러질 소리란 말인가... 저 말 하나에 담긴 오류가 대충만 봐도 몇 개란 말인가!     


서울 사람들 서울 뺀 지방은 다 시골인 줄 아는 거(내 얘기다...) 서울 토박이였던 나도 알지. 아무리 여기가 ‘시’라지만 서울의 ‘구’ 하나 인원 정도가 사는 작은 도시니까 뭐 시골이라 여길 수 있다 치자.

근데 여기 엄마들이 서울 엄마들에 비해 직장을 다니는 비율이 현저히 낮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 지인들만 봐도 학교 선생님에, 보건소 직원에, 카페 아르바이트에... 들여다보면 바쁘다 바빠 시골사회... 아니 소도시 사회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지낼 때 주변 엄마들이 다 직장맘이었던 것도 당연히 아니다. 단순히 거긴 직장맘이 많고 이 작은 도시엔 직장맘이 없는 게 아니라, 인구달랐다.


직장 안 다니는 엄마들은 정말 시간이 남아도는가? 물론 아침 일찍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직장인들에 비해 아침 시간이 비교적 여유로울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게 마냥 늘어져있는 여유로움인가? 자기 치장을 할 필요는 없지만 가족을 챙기는 시간으로 아침시간은 매일 정신없이 흐른다. 챙기고 보조하고 배웅하고 나면 치울 게 산더미다.  

 

시간이 많아서 리락쿠마 유부초밥을 만들고 폼폼푸린 도시락을 만드는 게 아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예쁜 도시락 만드는 방법을 검색하고 하나하나 작은 도구들을 사고 장을 보고 그러는 게 아니다. 시골에 살건 서울에 살건, 직장을 다니건 안 다니건 ‘시간을 내서’ 만드는 도시락이다.

시간이 있어도 그런 도시락을 만들 능력치가 안 되어 김밥과 유부초밥 싸는 것을 선택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고(심지어 이것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출근이 바빠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풍날만큼은 아이에게 공들인 캐릭터 도시락을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도 저도 감당이 안 될 거 같아 부지런히 가게에 전화해 주문해 놓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게 다 제 나름의 정성이고 사랑이다. 전업주부라 시간이 남아도니까 저런 거 만들지! 같은 한 문장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일들이다.

       

"아, 엄마. 그런 거 아니야. 서울이며 시골이며, 직장이며 주부며 그런 게 어딨어. 내 친구들 봐도 만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다 만들고, 안 만들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안 해. 능력껏 하는 거지."  

   

엄마한텐 이렇게 말했지만 그 권사님한텐 누가 안 말해주겠지....

세월 흐를수록 말을 더 조심해야지, 섣불리 단정 짓지 말아야지(이미 섣불리 단정 지으며 살고 있다 나 역시...),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지. 1학기 마지막 소풍 도시락을 싸면서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출근 안 하는 엄마지만 오늘도 당연히 캐릭터 도시락과 문어 소시지는 못 만들었다. 대신 유부초밥과 방토에 다이소에서 산 동물픽 몇 개를 꽂아주었다. 슬라이스치즈랑 샌드위치햄을 식빵에 돌돌 말아 썰어주니 캐릭터 도시락까진 아니어도 제법 색감도 살고 있어빌리티 하다! 비록 옆에서 지켜보던 막내가 왜 형아는 체험학습을 두 번 가냐, 왜 자기 거엔 동물막대 안 꽂아줬으면서 형아 거는 꽂았냐 하며 아침부터 서럽게 우는 바람에 진땀을 뺐지만.

막내야, 2학기를 기약하자. 포차코는 아니겠지만 내 나름의 정성을 예쁘게 담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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